유럽에서는 ‘타협’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특히 젊은 이상주의자들 사이에서 타협은 기회주의, 무성의, 비열하고 수상쩍은 것, 고결함이 없다는 표시로 여겨지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더러 정의를 내려보라고 한다면, 타협은 삶(life)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타협의 반대는 이상주의도, 헌신도
아닙니다. 타협의 반대는 광신주의와 죽음입니다. 여하튼 타협이 필요합니다. 타협은 항복이 아닙니다. 타협은 팔레스타인인이 무릎을 꿇고 탄원하는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 유대인이 무릎을 꿇는 것도 아닙니다. ---「정의와 정의의 충돌」중에서
제가 보기에 전쟁의 반대는 사랑이 아니고, 또한 동정도 아닙니다. 전쟁의 반대는 관대함도, 우애도, 용서도 아니라는 게 저의 확고한 견해입니다. 전쟁의 반대는 ‘평화’입니다. 모든 민족은 평화롭게 살아야만 합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이스라엘 국가와 팔레스타인 국가가 서로 품위 있는 이웃으로 억압과 착
취, 유혈사태나 테러, 폭력 행위 없이 공존할 수 있게 된다면, 설령 사랑이 만발하지 않더라도 저는 충분히 만족할 것입니다. ---「정의와 정의의 충돌」중에서
광신주의란 단지 두드러진 활동을 하는 원리주의자나 열광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TV를 통해 광신자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는 사람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날카롭게 슬로건을 외치며 카메라를 향해 종주먹을 치켜드는 히스테릭한 군중의 물결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광신주의는 거
의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견 광신주의와는 무관한 듯한, 보다 조용하고 보다 문명화된 형태로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가 하면 불현듯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광신자를 어떻게 치유할까」중에서
소설을 쓰는 행위는 아무리 다른 무거운 짐들을 지고 있는 상태라 해도, 어쨌든 매일 아침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서 타자를 상상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만약 내가 등장인물로서 이 여성이라면, 혹은 이 남자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저 자신의 출신 배경이나 개인적 인생 스토리 및 가족사를 생각하면 제 유전자가 조금 비틀렸거나 부모의 상황이 조금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이 여자나 저 남자처럼 되
었을지 모른다고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민이 되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극단적 극정통파 유대인이 되었을지도 모르며 제3세계에서 온 동양계 유대인, 그 밖의 어떤 미지의 인간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의 적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이렇게 상상해보는 것은 늘 도움이 됩니다. ---「광신자를 어떻게 치유할까」중에서
사리에 아주 밝은 제 할머니께선 유대인과 무슬림이 아닌, 유대교도와 기독교도의 차이를 아주 쉽게 이렇게 설명해주셨습니다. “알고 있니? 기독교도란 구세주가 한 번 이 세상에 왔는데 언젠가 또 다시 온다고 믿는 사람이고, 유대교도란 구세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이란다. 그리고 이 차이로 말미암아 엄청난 분노, 박해, 유혈과 증오가 되풀이되어왔지. 왜 모두가 그냥 좀 더 기다려볼 수는 없는 걸까? 만약 구세주가 와서 ‘안녕하세요, 또 뵙게 되네요’라고 하면 유대교 신자가 잘못을 인정해야만 하고, 그와 반대로 구세주가 와서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라고 하면 기독교계 전체가 유대교 신자에게 사과하면 되는 건데 말이야. 아무튼 지금부터 그때까지, 그냥 서로 간섭하지 않고 각자 따로 살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