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은 덴마크의 오덴세에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라는 이름은 안데르센이 루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대부모(代父母)가 붙여준 이름이다. 안데르센의 집안은 할머니가 병원에서 청소부로 일할 정도로 가난하여, 안데르센의 성장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독실한 루터교회 신자인 어머니는 안데르센에게 예수를 공경하는 순수한 개신교 신앙을 심어주었고, 아버지는 인형극과 독서를 통해 어린 그에게 옛날 이야기와 《아라비안 나이트》를 자주 들려 주며 상상력과 교양을 심어주었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가장의 자리가 비게 되자 안데르센 소년은 어린나이에 공장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빨래를 대신해주는 일을 했다.
1819년에는 연극 배우의 꿈을 품고 코펜하겐으로 갔으나, 변성기 이후 목소리가 탁해지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더구나 가난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서 문법과 맞춤법이 엉망인 그의 연극대본은 극단주에 의해 반송되었기에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극심한 마음의 고통에 시달렸다. 다행히 그의 작가로서의 재능을 알아본 국회의원 요나스 콜린의 후원으로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으나, 안데르센이 시를 쓰는 것을 싫어하는 교장과의 갈등 때문에, 5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1828년 코펜하겐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몇 편의 희곡, 소설을 쓰면서 작가로서의 재능을 드러낸 안데르센은 《즉흥시인》(1834년작)으로 문학계의 호평을 받았다. 1835년부터 본격적인 동화 저작에 들어갔는데, 어른들도 읽을 정도로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하지만, 일부 문학비평가들은 "《즉흥시인》을 쓸 정도로 뛰어난 작가가 어린이를 속이는 이야기나 쓴다"는 가혹한 비난을 하기도 했다.
1872년까지 발표한 총 160여편의 동화 작품은 모두 유명해져서 연금수령, 안데르센의 그림이 들어간 우표 발행이라는 영광을 누렸다. 62세 때 그는 고향 오덴세의 명예 시민으로 받들어졌으며, 그가 1875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 장례식에 덴마크 국왕과 왕비가 참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