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냈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참 좋아했던 낮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 자기도 모르게 그녀는 그의 모습을 한눈에 훑어보았다. (……) 세상에, 왜 내가 저 남자를 놓친 거지? 몇 년 전, 매달렸던 것은 그였다. 내가 아니란 말이다. (……) 모든 것은 코털 때문이었다. (……) ‘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라고 그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백의 마지막 말을 완성했을 때, 그녀는 그의 코를 보고 있었다. 콧구멍 아래로 한 뭉치의 코털이 삐져나와 있는 그의 코를 보고 있었다. (……)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토록 거대한 코털을 소유한 남자와 연애를 할 수는 없었다. 얼렁뚱땅 몸을 더듬은 것도 아니고, 당장 같이 살자고 한 것도 아니고, 경박하게 ‘내 아를 낳아도’라고 한 것도 아닌 그를, 단지 ‘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던’ 그를, 그녀는 그래서 걷어찼다. 고작 코털 때문에 말이다. 그냥, 그녀는 다른 기회가 있을 것 같았다. 코털이 삐져나오지 않은, 괜찮은 남자가 세상에 널렸을 것 같았다. (……) 세상에, 저렇게 멋진 남자를 내가 놓쳤다. 겨우 코털 때문에……. 정말이지 다시는 털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리라. 작은 것에 연연해서 큰 것을 놓치지 않으리라.
그런데 어쩌면 그녀의 느낌이 옳았던 게 아니었을까요? 4년쯤 뒤에 그녀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그 남자는 삐져나온 코털쯤은 예사로 여기는 털털한 성격에다가 한 번의 대화에 침을 한 바가지쯤 쏟는 열정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 남자의 코털과 침은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거슬리지 않음’을 신기해하며 그와 자신이 천생연분임을 확신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그냥 내키는 게 정답이야. 연분은 따로 있어.” --- 〈아닌 건 아닌 것 아닌가요?(pp.15-21)〉 중에서
유리는 스물아홉 살이 되면서 알게 되었다. 이 사회에서는 돈이 많거나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면서, (감히!) 싱글인 여자를 죄인처럼 본다는 것을. (……) 유리의 세 살 위 언니 주리는 유리보다 예쁘고 공부도 잘 했고 멋진 직업을 가졌다. 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올해를 넘겨선 안 돼!" 25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고 가 결혼정보회사에 유리의 정보를 입력시키고 온 어머니는 독립투사처럼 선언하셨다. (……) 유리는 유통기간이 올해로 끝나는 통조림이었다. 유리가 결혼을 결심한 네 번째 남자는 유리보다 열 살 많은 의사였다. (……) 동생 유리의 앞에서 성혼선언문이 낭독되던 순간, 서른두 살의 언니 주리는 바로 일주일 전 창근과 헤어지던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 일주일 전, 창근은 주리에게 결혼하자고 했었다. (……) 물론 주리는 창근을 사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주리는 ‘다른 것’도 필요했다. 넉넉한 경제력. 그것이 보장해줄 안락함. 그리고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 같은 것. (……) 3년 후. (……) 유리는 남편이 샤워하러 들어간 틈에 남편의 휴대폰에 걸려온 낯선 여자의 전화를 받았다. (……) 뭐, 상관없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 한편, 주리는 여전히 잘나가는 싱글이다. 완연한 서른다섯. (……) 얼마 전 주리는 창근이 어떤 소박한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식투자로 대박을 터뜨려서 강남의 40평대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는 소식과 함께. (……) 더 나은 조건을 찾아 결혼을 미뤘지만, 더 나은 조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건으로 결혼한 유리도 후회하고, 조건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주리도 후회했다. 그러니까, 조건은 조건일 뿐 후회하지 말자! 그럼 결혼을 무엇으로 하냐고요? 에이, 다들 아시면서……
--- 〈결혼은 무엇으로 하는가(p.102-109)〉 중에서
스물다섯, 연주는 취직을 했습니다. 그 무시무시하다는 취업난을 당당히 뚫었던 것입니다. (……) 회사에 입사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신입사원 환영식이 열렸습니다 .(……) 삼겹살집에서 옆에 앉은 상사가 술을 따라줍니다. (……) 연주는 술잔을 곱게 받아, 자기 앞에 곱게도 내려놓았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상사가 물었습니다. “김연주 씨, 술 못 마시나?” 연주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전 술 냄새가 싫어요.” 잠시 뜨악한 표정으로 연주를 보던 상사는 이내 술병을 들고 옆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상사가 있는 옆 테이블이 사람들로 넘쳤습니다. (……) 일만 잘하면 되지, 술자리가 뭐 그리 중요한가요? (……) 남자 직원들은 종종 자기들끼리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잡담을 나누는 모양이었습니다. 아니, 꼭 남자 직원들만 그랬던 건 아니에요. 연주의 입사 동기 지숙 씨도 종종 휴게실 잡담에 참여하곤 했으니까요. (……) 그로부터 두 달 뒤, 정식 공고가 떴습니다. 파격적인 조건의 해외 연수 공고였습니다. 연주가 너무나 가고 싶었던 해외 연수. (……) 연주는 새벽에 영어 학원을 다니며 인터뷰를 준비하고, 각종 서류를 마련했지만, 최종 선발된 두 명의 인원은 지숙 씨와 정식 씨였습니다. 연주보다 몇 달 먼저 담배 연기 자욱한 휴게실에서 이 정보를 비공식적으로 접한 이들은, 연주보다 훨씬 알차게 연수 지원 자격을 준비할 수 있었던 거죠. 그렇지만 연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 늘 휴게실에서 노닥거리고, 거의 모든 술자리에 참석하여 술에 취하고, 매일 다른 종류의 사람들과 밥을 먹느라 점심시간을 한참 넘겨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승진해갈 때 연주는 승진하지 못했습니다. (……) 연주는 정말 일 잘하는 직원이었을까요?
연주를 보다 못한 한 여자 선배가 연주를 불러서 차분하게 이야기해줍니다. 대한민국의 일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해. 공식적 커뮤니케이션과 비공식적 커뮤니케이션. 주로 술자리, 담배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비공식적 커뮤니케이션 속에 의외로 유용한 정보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게 문제겠지. 전통적으로 술자리, 담배자리는 남성의 영역이라서 여성들은 그런 정보에서 배제되기가 쉬워. 술 담배를 배우라는 뜻이 아닌 건 알겠지? 좀 영리해지자는 거지. 여우처럼. 그냥 좀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해. 스스로 비주류가 되지 않는 것, 애써 자기 자신을 필요한 것들로부터 배제시키지 않는 것.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방식을 이해하는 것, 좋아하지 않아도 인정하는 것. --- 〈과연 일만 잘하면 될까요?(pp.150-156)〉 중에서
호텔의 객실을 청소하는 것, 그것이 엄마의 일이었다. 유주가 일곱 살, 유주의 오빠 유준이 열 살 때 아빠가 돌아가시면서부터 엄마는 호텔의 객실을 청소해왔다. (……) 오빠 유준은 엄마의 자랑이었다. (……) 내가 서운한 마음에 “엄마 자식은 오빠밖에 없지?” 하고 쀼루퉁하게 물었을 때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도 다 내려놓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 것을, 엄마도 무거운 짐을 나눠 질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엄마에게 딸은 아들보다 편하고 가까운 존재라는 것을, 엄마는 말하지 않았다. (……)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유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엄마는 작정이나 한 듯, 소리를 높였다. “미국? 그 먼 데 가서 머하게? 니도 참 유난시럽다. 거기 가면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잘 다니던 회사는 밸나게 관두고…….”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뭐야! 이 말을, 결국 해버렸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우체국에서 통지가 왔다. 한국에서 우편물이 왔으니 찾아가라고. (……) 상자 가장자리에 꽁꽁 묶인 검은 비닐봉투가 있었다. 들어보니 짤그락거렸다. 풀어보니 동전들이 쏟아져 나왔다. (……) 수많은 나라의 잔돈들. 엄마는 호텔의 객실을 청소하며 이 동전들을 모았으리라. 팁이라며 건네주는 동전을 순하게 받아 넣는, 침대에 바닥에 구석에 사람들이 흘린 동전들을 소중하게 주워 넣는 엄마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딸이 있는 ‘먼 나라’의 돈이니까, 한 푼 두 푼 모으면 무심한 딸의 한 끼 밥은 될 수 있을 외국의 돈이니까.
후회할 줄 알면서,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인 줄 알면서, 우리는 엄마에게 함부로 말하고 맙니다.
엄마는 엄마니까, 엄마는 받아줄 거라는 걸 아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엄마는 이 세상에서 조건 없이 나를 받아줄 유일한 사람. 엄마니까요.
---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뭐야?(pp.238-247)〉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