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조기 알츠하이머병으로 46세에 돌아가셨지만 그 시절 아무도 조상으로부터 병을 물려받았다는 수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할아버지에게 전투 신경증이 생겨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머리가 돌았거나’, ‘저능하거나’, ‘머리가 이상한’ 사람들이 겪는 설명할 수 없는 신경 질환을 그때는 보통 전투 신경증 탓으로 돌렸다. 셀마 고모가 치매로 마흔이 넘기 전에 돌아가셨을 때도 친척들은 어떤 연관성도 보지 못했으며 고모가 폭행을 자초해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오히려 고모를 비난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유전이 의심되는 가능성을 숨기거나 무시했다. --- p.30~31
내가 아는 것이 있다면 삶에서 명백한 단 한 가지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순교자는 아니지만 나는 남들에 비해 더 일찍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그래서 무섭냐고? 글쎄,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 동안 이 여행이 육체적인 도전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도전도 될 거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수년간 처음으로, 특히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은 후 나는 완전히 혼자 있게 되었다. 따라서 많은 시간을 혼자 생각하며 보내야 했지만 혼자 있는 걸 내가 얼마나 즐길 수 있는지도 알게 됐고 혼자 있는 게 낫다는 기분까지 들기도 해 놀랍기도 했다 .--- p.68~69
속도를 조금 내기 시작하니 들소 몇 마리가 나를 따라 역시 속도를 올리기 시작해 좀 겁이 났다. 더 빨리 달리니 들소 떼는 나를 따라 나란히 달렸다. 시속 8킬로미터 정도로 속도를 올리자 들소들은 발굽으로 땅을 두드리고 커다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말 그대로 네 발을 땅에서 모두 뗄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초현실적인 경험이었다. 들소들은 마치 나를 그들 무리 중 한 마리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들소 떼는 나와 함께 90미터 정도 뛰더니 결국 포기했다. 사이드미러로 들소 떼가 물러나는 모습을 보며 난 안도했다. 끔찍한 결과가 날 수도 있었던 만남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신비로웠다. --- p.109~110
도로 위를 달리고 있자니 들리는 소리라곤 거친 내 숨소리와 도로 위를 구르는 바퀴 소리뿐인 황야의 기나긴 고요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 위에는 나를 따라오는 내 그림자밖에는 없었다. 무료로 비키와 채팅할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하지 않는 이상, 통신비와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잠깐 짬을 내어 어쩔 수 없이 그날 이동에 관해서만 얘기했다. 다른 사람의 와이파이를 빌리게 되어도 대개 화장실에서 연락했다. 따뜻하고, 비도 피할 수 있고, 조용한데다가 매일 어마어마한 양을 먹어대느라 첫 4개월은 볼일을 자주 봐야 했기에 화장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됐다. “크리스 그레이엄 씨, 또 화장실에서 페이스타임하는 거야?” 비키는 아이폰 화상 창에 내 알몸이 뜨자마자 이렇게 불평하곤 했다. 하지만 온몸을 감싸는 일체형 라이크라를 벗는 방법은 알몸이 되는 것뿐이었다. --- p.134
언제부터 셜리에게 말을 걸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여정 초반부터 그랬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혼잣말도 하기 시작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을까봐 초조해하면서 중얼거리곤 했다. 매일 아침과 밤에 공들여 그날의 예정된 혹은 기록한 여정을 확인하고 짐이 엉망이 되지 않았는지 혹은 두고 온 것은 없는지도 확인하는 강박 장애와도 같은 의식을 치르며 혼잣말을 했다.--- p.146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내가 앓고 있는 병 역시 원인이 있고, 진행 과정이 있으며, 따라서 치료법도 있을 수 있다. 내 가장 큰 바람은 내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의 다음 세대는 내가 마주하는 것을 마주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무척 사랑하는 사람들도 내 옆에 있다. 여전히 순수한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그러니 부디 내가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난 고통을 받고 있지 않다. 난 애를 쓰고 있을 뿐이다. 주변 세상에 일부가 되려고, 예전의 내 자신과 계속 연결되어 있으려고 애를 쓰고 있을 뿐이다. 현재를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난 매순간을 살고 있다.--- p.235~236
밤낮 할 거 없이 내가 가는 길을 함께하며 내게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비키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연애 초반부터 나와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치매 진단과 (남은 시간이 점점 줄고 있는데도) 일 년간 자기와 아이 곁을 떠나 있겠다는 내 계획을 맹목적으로 받아주었다. 이 무모한 모험이 함께할 시간 중 5분의 1일을 앗아갔는데도 비키는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반대로 여정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지와 용기를 주었다.
지금의 나로 살 수 시간이 몇 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여기, 북미 대륙 횡단이라는 의외의 선택을 한 남자가 있다. 8개월의 긴 시간 동안 페달을 밟으며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했다. 내가 내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며 살아간 그의 여정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을 뜨겁게 기억하도록 한다. 인생의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이 책을 펴보길 바란다.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크리스는 좌절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특유의 모험심과 인내를 발휘하여 북미 자전거 횡단을 완주한다. 그의 여행기는 단순히 몸을 옮겨 횡단하는 모험담에 그치지 않는다. 긍정적인 자세로 때로는 자신만의 위트로 삶의 무게를 견디는 그의 모습을 바라볼 때 우리는 느끼게 될 것이다. 이제 곧 떠나는 그의 인생을 왜 우리가 지켜보고 기억해야 하는지.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만약은 없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