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년 전, 애나벨이 제럴드 딜러니와 결혼한다는 소리를 처음 들었던 순간, 데이비드는 어떻게든 이 갑갑하고 고통스러운 우울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일도 손에서 놓고 몇 주 내리 술에 절어 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 대신, 아예 생각을 접고 더 열심히 일에 몰두하다 보니 뭘 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그는 혼자 있고 싶었고, 주변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직장 때문에 주변 분위기를 바꾸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럼에도 주변을 바꾸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그러다 보니 상상에 살이 붙었다. 애나벨이 결혼이라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잠시 상상한다고 뭐 안 될 게 있을까? 아주 잠시나마 애나벨이 나와 결혼했다고 한숨 돌리며 행복한 상상에 빠지는 게 왜 안 되는데? 그렇다면 나와 애나벨은 무얼 하고 있을까? 분명 프로스버그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어딘가에 있는 예쁜 주택으로 이사 갔을 것이다.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집을 장만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졌다. 회사가 있는 프로스버그의 누추한 하숙집, 그리고 그가 월급의 90퍼센트를 쏟아붓고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교외에 있는 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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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그는 2층 더블 침대에서 그녀와 같이 잠들었다. 그녀에게 팔베개를 해주다 몸을 돌려 그녀를 꽉 끌어안으면 그의 욕정은 상상 속 여체의 무게를 느끼며 여러 번 절정에 도달하고도 그 이상으로 치솟았다. 그런 다음 손으로 침대보를 쓸면 그저 헛헛함과 외로움에 젖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그는 애나벨이 종종 뿌리는 걸 눈여겨보고 사둔 카슈미르 향수병을 내다 버렸다. 애나벨이 떠오르는 그따위 물건은 필요 없었다. 더군다나 향수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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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날 놓아줘. 마음에서도, 다른 모든 면에서도. 당신이 이런 말 한 거 알지? 아니, 정확히 이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 제럴드가 떠나고 나자 ‘이제 내가 사귈 차례다’라고 했어.” 찻잔을 뚫어져라 보던 두 눈에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한쪽 뺨을 타고 내렸다. 데이비드가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냈다.
“자기야, 이거 써.”
애나벨이 지갑에서 미용티슈를 꺼냈다. “지금도 변한 건 없어, 데이브.”
“아직도 제럴드를 사랑해?” 그는 절대로 그렇게 믿지 않았기에 이렇게 쉽게 물어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평생 과부로 살 건 아니잖아?”
“그건 아니야.” 그녀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한 후 축축해진 미용티슈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럼 내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유감스럽지만 우린 함께할 수 없어. 이 말을 하기가 정말 힘들다. 당신은 이해하지 않을 테니. 나도 이해가 안 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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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다시 머리가 맑아졌다. 애나벨이 그랜트 바버와 결혼하게 내버려둬야지, 한 번 더 뻔한 실수를 하게 둬야지, 오래가지 않을 테니. 그런데 재혼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바보처럼 일정이 뒤로 밀린다. 그 자식이 애나벨이 누운 침대에 기어들어 간다고 상상하자 식은땀이 흘렀다. 뭔가 확실히 해둬야 한다. 편지를 또 보낼까? 그는 편지는 포기했다. 그랜트의 목을 졸라 쾌감을 선사하며 죽이는 방법도 있지만 그랬다간 그가 감옥에 가야 한다. 증오심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약간의 위안과 미움, 경멸을 선사한다. 그래도 그는 애나벨을 완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애나벨은 그저 이리저리 속았을 뿐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추함과 평범함 속에 가두었다. 왜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