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은 언제나 수라를 즐겁게 들어서 상궁들과 궁녀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국 하나, 찌개 하나, 반찬 하나에도 수라간 상궁들과 궁녀들의 정성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아니, 어찌 상궁과 궁녀뿐이겠습니까? 수라상에 올려지는 음식들의 재료는 모두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난 것들입니다. 그 재료를 얻기 위해서는 농부와 어부들,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의 피땀어린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임금님은 그 많은 산해진미에 젓가락도 제대로 대지 않고 상을 물린 것입니다. --- p.10
임금님의 수라상은 12첩 반상
임금님은 하루에 다섯 번의 식사를 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의 정식 수라 외에 아침 수라 이전에 먹는 쌀죽과 밤중에 먹는 야참이 따로 있었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수라상을 차리는 아침과 저녁에는 12첩 반상을 차렸습니다. 〈첩〉이란 반찬의 수를 말하고, 〈반상〉이란 밥과 반찬으로 차린 상을 말합니다. 12가지의 반찬에는 국과 찌개와 김치와 장과 찜과 전골 등은 포함시키지 않았으니, 실제로 수라상에 오르는 반찬 수는 스무 가지도 넘었지요. 이런 12첩 반상은 왕과 왕비, 대왕대비 외에는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3첩 반상, 5첩 반상으로 식사를 했으며, 양반들은 7첩 반상, 9첩 반상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의 수라상이야말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잘 차려진 밥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 p.16
궁녀들은 최 무수리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수리라는 것은 궁궐에서 물을 긷고, 아궁이에 불을 때는 등 궁궐의 허드렛일을 하던 여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궁녀들의 몸종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의 사랑을 받는 여인이라면 후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숙종은 얼마 되지 않아 최 무수리에게 숙원이라는 후궁 첩지를 내렸고, 숙원은 훗날 아들을 낳아 숙빈이라는 후궁의 최고 자리에 올랐습니다. 최 무수리가 낳은 아들이 바로 조선 제 21대 임금인 영조랍니다. --- p.21
궁녀의 일생에 대해 알아볼까요?
궁녀는 보통 열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궁궐로 들어가 궁녀로서의 교육을 철저히 받았습니다. 궁궐에 들어간 지 15년이 되면 관례를 올리는데, 이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성인식이면서 왕과 결혼을 하는 혼례식이기도 했습니다. 궁녀들은 왕 말고는 어떤 남자와도 사랑을 할 수 없었으며, 대궐 밖을 나가는 일도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거나 큰 병이 나면 대궐 밖으로 나가 살아야 했습니다. 궁녀들만 사는 마을로 들어가 살거나 절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습니다. --- p.47
후원을 거니는 중전의 마음은 외롭고 슬프기까지 했습니다. 나무마다 피어난 갖가지 빛깔의 꽃들이 후원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지만 중전의 눈에는 그런 모습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중전은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최 상궁에게 넌지시 물었습니다.
“최 상궁, 자네는 외롭지 않은가?”
“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나는 가끔 외롭기에 하는 말일세. 내게는 왕자도 없고 공주도 없네. 전하께서 계시다고는 하나 전하는 나만의 지아비가 아니라 만백성의 아버지가 아닌가. 또한 전하를 바라보는 많은 궁녀와 후궁 속에서 전하를 독차지할 수 없으니 자네의 신세와 그리 크게 다를 것도 없네.”
중전의 말은 최 상궁의 마음을 민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중전마마, 전하께서 만백성의 아버지이듯 마마께서도 만백성의 어머니시옵니다. 저희 모두 중전마마를 하늘처럼 생각하고 있사온데 그런 말씀을 하시니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중전은 쓸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금님이 오랜만에 중전의 침전에 찾아온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습니다. --- p.78
유원지로 하락했던 창경궁
창경궁은 성종이 대비들인 정희 왕후, 소혜 왕후, 안순 왕후를 위해 지은 궁궐입니다. 그러니까 성종에게는 할머니, 어머니, 작은어머니가 되는 분들이었지요. 원래 창경궁은 태종 임금이 왕위를 세종 임금에게 물려주면서 자신이 생활하려고 지은 수강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창덕궁과 함께 조선 시대의 별궁 역할을 하게 된 것이지요.
창경궁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모두 불탔고, 그 뒤에 다시 재건했지만 크고 작은 화재가 일어나면서 순조 임금 때에 이르러서야 완공할 수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1907년에 순종 임금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일제는 창경궁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꾸며 놓고 놀이 시설을 만들고, 벚나무를 심어 유원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꾸었답니다. 이것은 나라의 권력을 상징하는 궁궐을 내리 깎기 위한 방법이었지요.
창경궁은 1983년에야 본이름을 찾았고, 동물원을 철거하면서 예전의 궁궐로 본모습을 찾을 수 있었답니다. 숙종 때 장희빈의 죽음, 사도 세자의 죽음이 이 궁궐에서 쿀어났습니다.
--- p.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