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성령의 권능으로 열매를 맺으라!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다. 성령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성도들을 통해서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보여준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성도들에게 권능이 임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
권능은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다. 권능이 임하면, 모든 것이 변화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변화의 책이다.
우리는 그동안 권능을 너무 큰 의미로만 생각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고, 기적을 나타내며, 혁명적인 변화를 이끄는 것으로만 생각해온 것이다. 물론 그런 접근도 맞다. 그렇지만 성령의 권능은 일상의 소소한 영역에서 실제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에서 우리가 소홀하게 여겼던,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성령의 권능을 살피고자 한다. 이것을 살피고 추구하는 데서 얻는 유익이 크리라 생각한다. 원자핵은 에너지를 일순간에 전부 발생시키면 폭탄이 된다. 그러나 그 에너지를 작은 힘으로 나눠서 발생시키면 실생활에 유용한 원자력이 된다. 이와 비슷하게 성령님은 우리에게 폭발적인 능력도 주시지만,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서 승리할 수 있는 실제적인 힘도 공급하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삶에서 실제적인 열매를 맺게 하신다.
성령의 권능이 임할 때
삶에서 실제적인 열매를 맺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생각’과 ‘실천’이다. 바로 성령님이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생각한다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생각하게 된다. 흔히 성령 충만해지면 황홀경에 빠져 판단력이 흐려진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똑똑해진다. 생각하게 된다. 다음 말씀을 보라.
“저희(이스라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凡人)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행 4:13).
‘학문 없는 범인’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충만 이후에 똑똑하게 변화되었다.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의 지성(知性)을 자극하신다.
나는 이렇게 단언한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좋은 그리스도인이다. 반대로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왜 나쁜가? 생각이 없으면 닥치는 대로 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바람 부는 대로 산다. 휩쓸리면서 산다. 표류하는 인생이다. 시류에 편승하는 인생이다. 생각해야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한국 축구의 영웅이요 한국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 히딩크 감독이다. 히딩크의 기여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선수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공만 향해 뛰는 것을 ‘동네 축구’라고 한다. 반면에 생각하면서 하는 축구를 ‘전략 축구’라고 한다. 히딩크는 우리 축구를 동네 축구에서 전략 축구로 만들었다.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곧 강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에머슨(Emerson, 1803~1882.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은 “좋은 리더는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가장 좋은 리더이신 성령님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신다. 성령님의 권능을 받아 생각하라!
세계 최고의 부자, 최고의 CEO로 인정받는 빌 게이츠의 강점이 무엇인가? ‘생각’이다. 그는 매년 두 차례 ‘생각하는 주간’(Think Week)을 갖는다고 한다. 그때는 모든 연락을 끊고 책 몇 권 들고 어디론가 들어가 오직 생각만 한다고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사(社)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남은 인생은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 가운데 최근 그가 내린 결정은 자선 재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딴 ‘빌 앤 멀린다 게이츠 재단’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에이즈나 기아로 고통받는 사람을 돕고, 학교가 없는 곳에 학교를 세우고 있다. 훗날 빌 게이츠는 사업가라기보다는 자선사업가로 더 알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이 있기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 시간은 생각하는 시간이다. 기도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중에 ‘의미’를 찾고 ‘방향’을 찾는 것이다. 일을 멈추고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기도는 여백이다. 기도는 삶에 여백을 만든다.
성도들 가운데 ‘빈 곳’을 보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편지를 써도 띄어쓰기나 줄 바꿈 없이 종이 몇 장을 빽빽이 채운다. 일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참기 어려워한다. 무엇이든 열심히 많이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도라는 여백이 있어야 한다. 기도 없이는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기도는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자리로 우리를 이끈다.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게 한다.
존 템플턴(John Templeton, 1912~2008)은 전설적인 투자가였다. 종교계 노벨상이라는 템플턴상을 제정한 그는 기도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하루 일과를 기도로 시작한다. 중요한 투자 결정은 기도를 통해 내린다. 물론 항상 응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세상과의 단절을 체험한다. 적어도 기도하는 중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게 된다.”
그렇다. 기도가 있어야 명확한 생각이 가능하다. 생각해야 핵심이 잡힌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한다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 권능을 받은 사도들의 이야기를 사도‘행’전(使徒‘行’傳)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영어로도 Acts이다(act는 행동이란 뜻이다).
기독교는 행동, 즉 실천을 강조한다. 만약 우리 삶에 열매가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삶에 열매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행동해보았는가? 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라.
키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라는 철학자가 있다. 그는 많은 유익한 말을 남겼다. 그중 수학책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는데, 그 대략은 이렇다. 수학책은 대개 앞부분에 문제가 있고, 뒷부분에 정답이 있다. 그런데 뒤쪽의 정답을 본다고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뒤의 정답은 “자기 답이 아니다.” 언제 그 정답이 자기 것이 되는가? 자기가 실제로 문제를 풀었을 때이다. 풀어서 뒤의 정답과 같은 답이 나왔을 때, 비로소 자기 답이 된다. 단순히 정답을 안다고 그것이 내 답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교인들은 삶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 문제의 정답을 말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풀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삶에서 실제로 실천을 통해 문제를 풀어야 그 정답이 자기 것이 된다. 만약 정답을 말하기만 하면 된다면, 교리책 한 권만 보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한 권만 정독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답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설교자를 과외 선생으로 생각한다. 설교자는 ‘정답을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같이 풀어주는’ 사람이다. 즉, 이미 정답을 아는 문제를 같이 풀면서 그 문제의 답이 정말 성경의 정답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보수적인 배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종종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목사님은 성경을 읽어놓고 왜 자꾸 딴 이야기만 하세요?”
성도들이 부닥치는 일상생활의 문제를 함께 풀기 위해서이다. 사실 정답만을 말하는 설교가 더 쉽다. 때로 나도 설교 준비를 충분히 못해서 ‘정답 설교’를 할 때가 있다. 그러면 말씀 중심적이라고 더 좋아하는 성도들도 있다. 물론 정답을 말하는 설교도 필요하다. “정답을 알면, 문제를 풀기가 훨씬 쉬워진다.” 그러나 계속 정답을 듣는다고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적인 행동이 문제를 푼다. 그래서 내가 실제적으로 행동하도록 돕는 설교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성령님을 본받고 싶다. 성령님은 정답만을 외치는 영(靈)이 아니시다. 성령님은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문제를 풀기 원하신다. 그분은 권능을 주셔서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해가신다.
실천의 영(靈)이신 성령님의 인도
히딩크 이야기를 하나 더하자. 2002년 4월, 월드컵을 50일 앞둔 때였다. 당시 온 국민의 소망이 우리 축구팀이 월드컵 16강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 가능성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히딩크는 이렇게 답했다.
“16강 진출의 가능성은 반반입니다. 그러나 하루에 1퍼센트씩 그 가능성을 높여가겠습니다.”
지금은 가능성이 50퍼센트니까, 매일 1퍼센트씩 높여서 100퍼센트가 되게 하겠다는 말이다. 히딩크는 언어의 마술사다. 그러나 동시에 실천가이기도 하다.
히딩크처럼 문제를 실제로 풀어나가는 실천의 사람은 반드시 점진성을 믿는다. 열매는 하루아침에 맺히지 않는다. 과정이 필요하다.
성령님은 바로 이 과정의 길로 우리를 이끄신다. 성령님은 행동의 영(靈), 실천의 영(靈)이시다.
이 책은 성령님이 함께하시고 권능을 주실 때 우리에게 생각의 힘과 실천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을 계기로 삶의 세미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간섭하시는 성령님의 섬세한 손길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 책은 소임을 다한 것이 될 것이다.
성령님의 손길을 느끼기를 바란다.
- 전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