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김소월金素月(1902~1934) 본명은 정식廷湜.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출생했다. 2세 때 아버지가 일본인들에게 폭행당해 정신병을 앓게 되자,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오산학교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도쿄상대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중퇴하고 귀국했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였던 김억의 지도와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920년에 <낭인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등을 <창조>지에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했다. 이어 <먼 후일>, <죽으면> 등을 <학생계> 제1호(1920.7)에 발표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배재고보에 편입한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닭은 꼬꾸요>, <봄밤> 등을 <개벽>지에 발표했으며, 이어 같은 잡지 1922년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그 후에도 계속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했고, 이듬해인 1924년에는 <영대>지 3호에 인간과 자연을 같은 차원으로 보는 동양적인 사상이 깃든 영원한 명시 <산유화>를 비롯하여 <밭고랑>, <생生과 사死> 등을 차례로 발표했다. 1925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에서 간행되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의 광산업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이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그 후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했으나 운영에 실패하고 이후 실의의 나날을 술로 달래는 생활을 했다. 33세 되던 1934년 12월 23일 부인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는데, 이튿날 음독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소월은 불과 5, 6년 남짓한 짧은 문단생활 동안 154편의 시와 시론詩論 <시혼詩魂>을 남겼다. 평론가 조연현은 자신의 저서에서 “그 왕성한 창작적 의욕과 그 작품의 전통적 가치를 고려해 볼 때, 1920년대에 있어서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했다. 7·5조의 정형률을 많이 써서 한국의 전통적인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으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한 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