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러시아 회화사에서 사실주의 경향을 대표했던 ‘이동전람파’(Передвижники; Itinerants) 화가들의 작품들을 보면, 러시아 자연을 담은 풍경화가 적지 않다. 이들의 풍경화에는 드넓은 강에서 끝없는 길까지 ‘위대한 러시아 땅’의 본질적 면모가 오롯이 살아 있다. 이런 점에서 이삭 레비탄(Исаак Левитан, 1860~1900)의 풍경화는 흥미로운 예를 제공한다. 이 책의 표지 그림으로 사용된 1892년 작 “블라디미로프카 대로”(Владимировка)에서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러시아 땅의 위대함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까지 쉼 없이 계속되는 러시아 삶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림 속 길은 단순한 물리적 차원의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러시아 민족의 삶이 깊게 아로새겨진 역사적, 문화적, 정신적 차원의 공간이기도 하다. “블라디미로프카 대로”는 한편으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을 고려할 때 모험의 역사적 공간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데카브리스트의 시베리아 유형을 상기할 때 억압의 문화적 공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와 동시에 블라디미로프카의 끝없이 펼쳐진 길은 러시아인에게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의 상징 공간이 되기도 하고, 자유롭고 자발적인 ‘러시아 영혼’의 상상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한 편의 풍경화 속에 나타난 길을 통해서도 우리는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된 러시아 사람들의 역사를 읽을 수 있고, 문화를 느낄 수 있으며, 정신을 가늠해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볼가(Волга)라는 한 줄기 도도한 강을 통해서도 우리는 러시아 역사의 강을 횡단할 수 있고, 러시아 문화의 강에서 헤엄칠 수 있으며, 러시아 정신의 강 속에 침잠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우리가 말하는 ‘러시아 인문공간’의 본질적 특성도 바로 이렇게 생성되고 발전했다. ‘러시아 인문공간’은 러시아 사람들이 고대에서 현재까지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독특하게 형성하고 발전시킨 물리적, 정신적 생활공간의 총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러시아 인문공간’ 개념 안에는 러시아 영토의 실제 지리에서부터 예술적으로 ‘상상된 지리’나 문화적으로 ‘구성된 지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념적 요소가 포함된다. 이와 함께 ‘러시아 인문공간’ 개념은 과거의 농촌 공동체 ‘미르’에서 현대의 우주 정거장 ‘미르’까지도 폭넓게 아우를 수 있는데, 이는 다면적, 다층적 의미의 러시아 땅과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공간’ 개념이 필요한 이유를 잘 말해준다. 물리적 ‘세계’를 가리키는 동시에 추상적 ‘평화’를 의미하기도 하는 러시아어 ‘미르’(мир)가 과거에는 농촌 공동체를, 현대에는 우주 정거장을 뜻하는 개념이었다는 사실은 러시아 ‘인문공간’과 사유체계의 독특성을 방증한다.
이러한 일반적 전제를 바탕으로 우리는 이 책에서 먼저 ‘러시아 인문공간’의 형성과 발전을 러시아에 고유한 자연환경과 인간생활의 상호관계 속에서 설명하고자 했다. 제1부에서는 국가형성 초기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강으로 이뤄진 수로체계를 이용한 러시아의 영토 확장이 ‘인문공간’의 형성과 발전에서 담당한 중차대한 역할에 대해 고찰한다. 제2부에서는 포스트소비에트 시대 러시아의 중앙과 지방에서 일어난 도시 공간과 상징체계의 변화를 탐구한다. 소비에트에서 포스트소비에트 시대로 바뀌면서 민족 정체성과 지역 정체성도 새롭게 정립되는데, 이 과정에서는 도시 공간과 상징의 변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제3부에서는 현대 러시아 영화에 나타난 문화적 공간의 의미 변화에 대해 카프카스와 농촌 공간의 이미지 재구성 작업을 통해 살펴본다. 제4부에서는 고려인과 아르메니아 공동체를 중심으로 러시아연방의 영토 안에 형성된 디아스포라의 타자 공간에 대해 짚어본다. 이처럼 러시아 ‘인문공간’은 수로체계에서부터 디아스포라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고 다층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이 책 ??러시아 인문공간: 자연·인간·사회??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연구사업단이 “러시아연방 인문공간의 한국적 재구성” 아젠다 수행을 위해 기획한 ‘러시아 인문공간’ 총서 제1권으로 발간되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필자들이 러시아 인문공간 연구 과정에서 국내 전문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내용을 새롭게 다듬어 엮은 것이다. 제1부 “러시아 인문공간의 형성과 발전”은 ??동유럽연구??(제29권, 2012)와 ??동유럽발칸학??(제13권, 제1호, 2011)에, 제2부 “도시 공간과 지역 정체성”은 ??슬라브연구??(제22권, 제2호, 2006)와 ??슬라브학보??(제25권, 제4호, 2010)에, 제3부 “러시아 영화의 문화 공간”은 ??노어노문학??(제23권, 제2호, 2011)과 ??슬라브학보??(제27권, 제1호, 2012)에, 제4부 “디아스포라의 타자 공간”은 ??동북아논총??(제28권, 2010)과 ??슬라브학보??(제25권, 제2호, 2010)에 각각 출판된 논문으로 재구성했다. 기존 논문들을 이 책에 출판하도록 허락해준 해당 학회와 학술지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하지만 기존 논문들은 책으로 발간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수정을 대폭 거쳤다. 꼼꼼하고 섬세한 편집으로 잘못된 정보나 어색한 표현 등을 바로잡고, 불필요한 대목을 삭제하고,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는 등 기존 논문의 제목에서부터 각주에 이르기까지 세부 내용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러시아 인문공간의 대중적 접근과 이해를 돕기 위해 일반 독자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딱딱한 논문 형식을 최대한 완화하여 가독성을 높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러시아 인문공간에 관한 참신하고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기존 논문의 틀에 갇힌 채 학문적 탐구나 연구자 집단 속에만 머물지 않고 대중적 소통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책이 러시아 인문공간에 관한 기존 논문의 단순한 재구성에 그치지 않고 학문적 탐구와 대중적 이해를 겸비한 학술총서로 새롭게 탄생하게 된 주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끝으로, 어려운 출판환경 속에서도 ‘러시아 인문공간’ 총서 출판을 기꺼이 맡아주신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의 탁경구 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필자들의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주문을 늘 한결같이 상냥한 미소로 받아주신 탁 팀장님의 도움과 노력이 없었다면 이 책은 빛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울러, 인문한국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가운데 ‘러시아 인문공간’ 총서 기획과 출판에도 깊은 관심과 격려, 협조를 아끼지 않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홍완석 소장님과 연구팀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한다.
---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