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어느 특정한 시대에만 커다란 사건이거나 심각한 것은 아닐 것이네. (중략) 한 인간의 생애를 한두 마디로 요약한다면 ‘태어나고, 만나고, 죽는 것’이네. 다만 어린 나에게는 할머니의 죽음, 그 뒤에 할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자연적인 죽음 사이에 역사로서의 죽음인 전쟁 시기 학살과 전사라는 인위적인 죽음들의 비극이 엄청났던 것이네. 거기서 죽음이 얼마나 삶을 모독하는가를 죽음이 얼마나 삶 따위를 가소롭게 하는가를 소년인 나는 아무런 정신이나 의식의 단련 없이 체험한 것이었네. 어쩌면 내 근원의 허무주의야말로 이런 죽음의 극한 상태에서 발생했는지 모른다네. _고은 저는 그 허무를 ‘관념적 허무주의’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보는 겁니다. 도대체 어떤 허무주의가 이렇게 치열하고 열정적이며 불덩이 같을 수 있느냐는 이유에서이지요. 이 부조리한 세계의 실존을 견디는 것이 ‘혐오’이고 ‘허무’이며 ‘폐허 지향’이었다면 저는 그것을 ‘초월적 실존주의’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겁니다. _김형수 ---「고은 깊은 곳 1」중에서
시가 나에게 오고 내가 오는 시를 마중 나가서 우리는 함께 날 저문 귀로로 돌아온다네. 임신한 아낙처럼, 부상당한 전사처럼, 목마른 혼백처럼, 그것이 내 시의 밤이 되는 것이네. 나는 늘 천체물리학과 입자물리학에 사로잡히는데 그 첨단과학이야말로 나의 샤머니즘이니까. _고은 엘리엇은 ‘1사물 1언어’를 지향했다, 하듯이 고은의 세계는 무엇이다, 하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_김형수 아니네. 시인생활 60년을 내일모레로 앞두고 있는데 내 시의 여생도 무어라고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시의 몇십 년 역정을 한 마디로 단정하는 일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네. 누구는 무어라 하고 누구는 무어라 할 것이네. 그것들의 합산(合算)으로 하나의 애매몽롱한 공약수는 가정할 수 있을 터이지. _고은 ---「고은 깊은 곳 2」중에서
자그마치 시력 60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감회가 남다르리라 생각합니다. 고은 문학의 일출과 일몰을 한꺼번에 목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세상에 선생님의 시가 혼자 남 아서 메아리치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_김형수 ---「고은 깊은 곳 3」중에서
시는 모국어의 천부적 행복 속에서 살아 있는 것 이상으로 시는 다들 세상의 언어로 재생할 꿈을 가지고 있는 순례의 운명을 막지 못하네. 내 시도 그렇다네. 여러 나라에서 내 시를 받아들이는 그이들의 공감에 내 진실이 다가가는 것이 내 존재이유이기도 하네. (중략) 2017년의 행성 위에서 우리는 함께 숨 쉬며 함께 취하면서 함께 절망하면서 살아가는 공동의 미학을 이루어 갑시다. _고은 ---「고은 깊은 곳 4」중에서
저는 골수의 문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회과학의 식민지가 되기를 자처하듯이 조급한 관념적인 흐름에 말려 들어간 한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돌아보아지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 미숙함은 지금에 와서 많이 부끄럽지만 한편으로는 영원히 놓치지 말아야 할 치열성의 한 발로였던 측면도 버릴 수 없습니다. 이제 이 단체의 미래를 이끌어갈 새로운 주역들에게도 한 말씀 해주셨으면 합니다. _김형수 없네. 지금은 21세기라는 것, 이전보다 훨씬 복잡사회라는 것들을 깨달을수록 이 시대의 아이는 이 시대의 울음을 울어야 한다고 생각해. 단 하나를 지적하고 싶네. 언어에의 책임 말이네. 이게 무척 어렵다네. 언어는 늘 위험하다네. _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