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어느 한 면도 인간의 행위로 획득되지 않는다. 모두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딛 3:5-7). 그러므로 구원은 어떤 차원에서도 흠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하나님은 그의 구원 사역의 요소로서 회개, 믿음, 성화, 복종, 순종 그리고 궁극적 영화를 이루어내신다. 하나님은 이 일들을 이루시며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이 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누락될 가능성이 없으며, 어느 하나라도 빠진 경험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일 수 없다.”--- p.68
“현대의 복음전도 방식이 낳은 가장 유해한 부산물 중 하나는 각 사람의 죄의 실상을 직면하지 못하는 복음이다. 가장 보수적인 교회들조차도 거듭났다고 주장하지만 이방인처럼 사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신앙고백에 절대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도록 길들여져 있다.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명백하게 다른 삶에 빠져 지낸다. 그럼에도 누구도 감히 그들의 증거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p.108
“구속이라는 위대한 기적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 그를 사랑할 수 없다(요일 4:19). 구원은 하나님이 불신자의 마음을 변화시켜 그가 죄에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설 때 일어난다. 하나님은 죄인을 어둠의 영역에서 빛의 나라로 구출하신다(골 1:13).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가 믿음을 통해 그 마음에 들어가 거하신다(엡 3:17 참조). 이처럼 회심은 단순히 죄인이 그리스도를 모시기로 결단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그 개인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p.183
“구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회심에는 또 하나의 요소(복종)가 있다. 예수님의 초청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으로 끝나지 않는다. 계속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고 하신다. 예수님의 주재권에 복종하라는 부르심은 예수님의 구원 초청의 일부요 한 묶음이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주시는 구원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p.191~192
“율법의 멍에, 인간 노력의 멍에, 행위의 멍에, 죄의 멍에는 모두 무겁고 쓰리고 괴로운 멍에이다. 육체에 있는 크고 지기 어려운 짐을 나타내는 이 멍에는 절망과 좌절, 염려로 이어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질 수 있는 멍에를 주시면서 또한 그것을 질 수 있는 힘도 주신다(빌 4:13 참조). 거기에 참된 쉼이 있다. 예수님의 멍에가 쉽고 가벼운 이유는 그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달리 예수님은 우리를 억압하려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질 수 없는 짐을 쌓지 않으신다. 의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려 하지 않으신다. 그의 멍에에 순종하는 일은 즐겁다. 멍에가 목에 쓰리다면 우리가 불순종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 멍에는 고통스럽지 않다. 오히려 즐겁다. “너희 영혼이 쉼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은 죄책과 죄의 짐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