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가요계에 데뷔했지만 연예계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가수 활동을 마감했다. 본인의 음반과 다른 가수들의 음반 작사가로 참여하면서 작가의 꿈을 키웠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서일대 문예창작과 ·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이후 방송작가로 활동했고 틈이 나는 대로 영화 시나리오, 소설, 에세이를 쓰고 있다. 신인가수 보컬 트레이닝과 대학 강의를 하면서 후배 양성에도 힘쓰는 중이다.
“네가 정말로 사랑한다면 보내줘라.” 내 심장을 내어놓으라고 하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할 수 있는 일은 잠시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그뿐이었다. 그녀를 지킬 능력도 되지 않았고 좀 더 성숙하기까지 기다릴 인내력도 없었다. 그녀는 고모의 손에 이끌려 159번 버스에 올라탔고 나는 멍하니 서서 그녀를 보냈다.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걸 빼앗긴 기분으로 우두커니 서서 눈물을 흘렸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때 만든 노래가 ‘비와 당신의 이야기’다. 버스를 타고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멍하니 서서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작곡도 배우지 않았던 내가 그 순간 작곡이라는 걸 처음 하게 된 것이다. --- p. 24
작업에 속도가 붙으면서 여기저기서 곡 의뢰가 들어왔다. “이게 열아홉 살짜리가 쓴 곡이라는데 믿어져?”라는 대화들이 오갔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천재’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말을 자주 듣긴 했지만 음악하는 전문가들에게 인정받고 나니 우쭐한 마음까지 생겼다. 어쨌든 나는 그 덕에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음악을 시작할 수 있었고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멋진 음악을 만들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생각은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 p. 59
“아버지, 저 기타를 배우고 싶어요. 가르쳐주세요.” 아버지의 활동을 지켜보았을 때도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못했었다. 어린 나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몇 번 아버지를 흉내 내듯 기타를 치려는 시도를 해봤지만 바쁘신 아버지에게 가르쳐달라고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거니와 기타는 어른들만 치는 거라는 생각에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익숙한 아버지의 연주는 일상이었고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는 마술과도 같았다. 무엇이 나의 운명에 사다리를 놓고 순서를 정해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에게 찾아온 위기가 나에겐 기회가 되었다. --- p. 86
난 내가 아는 노래 중에 가장 가창력 있어 보이는 곡을 골라 최선을 다해 불렀다. 이 정도로 파워풀하게 부르면 세스릭스도 제법 한다고 칭찬해줄지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목에 약간 무리가 가긴 했지만 그럭저럭 노래를 불렀다. 세스릭스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래를 3개월만 하고 싶나요? 아니면 평생 하고 싶나요?” 그날로 난 레슨을 시작했다. 입술과 목을 자연스럽게 푸는 시간만 30분 가까이 걸렸다. 발성 연습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반복이었다. 입술을 ‘부~’ 떨면서 ‘도미솔도솔미도’를 반음씩 올려가며 소리 내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 p. 131
연주자들은 모든 사물과 형상을 항상 새롭게 달리 보는 습관을 들여야 하고, 다양한 표현을 연구해야 하며,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철학이 있어야 한다. 대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의 권유로 절에서 한 달을 지낸 적이 있다. 그때 명상과 참선을 하는 법을 배웠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때의 경험 덕분에 생활과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 조금은 깊이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 이렇듯 내가 살아온 모든 경험들이 음악적 내공으로 쌓이고,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 위에 더욱 강한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겉멋이 들어서 재즈를 하겠다는 친구들에게는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미칠 자신이 없으면 그만두라고. --- p. 155
한국에서는 흔히 있는 싸움 정도였는데 미국에서는 폭력에 대한 처벌이 강해 문제아 취급을 받게 된 것이었다. 학교의 처벌에 숨죽이며 조용히 지내던 어느 날 기숙사 밖에서 통학하던 친구가 뉴욕 맨해튼에 있는 가라오케에 가자고 했다. 맘껏 노래 부르고 싶은 욕심에 갈등하다 약속 시간이 되어 몰래 빠져나가려는데 그만 선생님한테 걸리고 말았다. 핸드폰도 없어서 담 밖에서 나를 기다리던 친구에게 사정을 말해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 친구는 한참 기다리다 화가 났는지 그 후로 말을 걸기가 힘들었고 나는 학교 측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며 생활해야 했다. 내가 외국인이라 그 정도가 더 했던 것 같다. 특별히 큰 사고를 친 게 없는데도 학교에서는 작은 사건 하나하나에 과민반응을 보이며 감시를 했다. --- p. 168
타악기만 연주하다 멜로디가 있는 악기를 연주하게 되자 표현의 넓이가 무궁무진해졌다. 배워야 할 것도, 하고 싶은 연주도 많아지면서 배울 수 있는 곳을 수소문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어려웠다. 전문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르칠 선생님을 찾기도 힘들었다. 오로지 독학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하모니카 연주 음반을 구입해 듣고 또 듣고 연습했다. 재즈하모니카 연주자 투츠 틸레만스의 연주가 내 교과서가 되었다. 형용할 수 없는 연주 테크킴을 하나씩 흉내 내면서 하모니카의 매력에 더욱 빠져들었다. 입술은 너덜너덜 피가 맺혀 굳은살까지 박였고 호흡을 많이 쓰다보니 두통도 심해졌다. --- p. 199
“야, 신입, 불 꺼야지! 너무 환하니까 사람들이 잠을 못자잖아. 빨리 꺼라.” 뺑끼통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험상궂은 죄수 한 명이 화를 내기 전 말투로 말했다. “저……. 그런데 불은 어디서 끄나요?” “응, 저기 뺑끼통 속에 스위치가 하나 있으니까 잘 찾아봐! 뺑끼통 속에 손을 넣으면 찾을 수 있을 거야.” 최근에는 외국 작품의 경우 외국 스태프들이 직접 와서 캐스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아 사전 지식 없는 상태의 오디션은 당연히 치르는 과정이 되었다. 후배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오디션을 보게 되자 나 역시 긴장하며 준비하게 되었고 후배들 역시 뻗어나갈 수 있는 시장이 넓어졌다. 그만큼 뮤지컬은 대중화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뮤지컬 배우의 꿈을 키우고 있다. 노래와 춤, 연기를 잘하는 이들뿐 아니라 가수나 탤런트, 심지어 개그맨들도 뮤지컬 시장에 발을 뻗고 있다. 좋게 말하면 그만큼 뮤지컬 시장이 호황이라는 증거지만 한편으론 뮤지컬이 아무나 할 수 있는 벽 낮은 장르인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