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렇듯 강한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내 자신의 경험 때문이다. 나는 스물두 살 때 읽는 법을 배웠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부모님이나 그때까지 나를 가르쳐 주신 탁월한 선생님들에게는 불공정한 일이 될 것이다. 읽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이해와 잘 읽고 말겠다는 의지가 스물두 살의 나에게 더해지면서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수동적 읽기와 능동적 읽기의 차이점을 배웠다(모티머 아들러의 도움으로). 읽기의 통상적 목표?다른 사람을 따라 그의 생각을 생각하기?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깨달았다(E. D. 허쉬의 도움으로). 그리고 어떤 종류의 질문들을 해야 하는지 배웠다(대니얼 풀러3의 도움으로). 스물두 살 이전에는 이분들이 쓴 글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난 신학교 시절, 대니얼 풀러 교수가 우리 학생들에게 강력히 요구한 첫 번째는 바라봄으로써?구체적으로는, 성경 본문을 바라봄으로써? 정말로 보는 것이 가능하고 유익하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있는 시간에 눈은 뜨고 있지만 보는 일이 수동적인 상태에 그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라. 세상을 보면서도 거의 아무 것에도 주목하지 않는다. 늘 뭔가를 듣지만 특정한 소리를 의식하는 경우는 드물다.
적극적으로 보고 듣도록 나를 독려한 사람은 풀러 박사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설교학 수업시간에 담당 교수가 목사는 예화집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사례를 가져와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고 그대로 30초 정도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그 다음 그가 말했다. “들었나?” 우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이렌 소리 말이야! 콜로라도 대로에서 난 거야. 앰뷸런스군. 우리가 여기 앉아있는 지금, 누군가가 크게 다쳤거나 많이 아픈가 보군.”
그 순간은 내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48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일을 기억한다는 사실은 내가 받은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 준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깨어나! 너는 몽유병자처럼 살고 있어. 보고 듣지만 아무 것도 알아채지 못해. 깨어나!’
이전에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보고 싶은 갈망이 더 커지도록 내게 잊을 수 없는 영감을 준 것이 하나 더 있다. 아가시와 물고기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완전히 빠져버렸다. 그것은 성경 공부라는 새로운 인생의 지평을 수놓은 환한 폭발과도 같았다. 그 환한 빛으로 성경의 모든 세부내용들이 밝게 드러났다.
갑자기 내가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패턴과 상호관계와 사고의 흐름을 보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은 어느 교사가 내게 무엇을 봐야하는지 말해 주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바라봐, 바라봐, 바라보라고.
3-23--- p.464~465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나도 비슷한 간증을 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더없이 감사하다. 한 교수님은 성경이 의미하는 바를 말해 주지 않고 3년에 걸쳐 여덟 과목의 수업에서 매일 “보게, 봐, 보라고!”를 외치셨고 내가 본 것에 대해 어떻게 질문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다.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오버헤드프로젝터로 성경 본문을 하나 띄운 다음에 우리에게 본 것을 말하게 하셨고 그것이 정말 그 안에 있는 내용인지 시험하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훨씬 많은 내용을 보게 되었다. 허세 같은 것은 없었다. 본문에 없는 내용이라면, 아무리 근사하고 영적인 소망적 사고를 늘어놓고 여기에는 없어도 다른 본문에는 있지 않느냐고 호소해도 통하지 않았다. 맞는 말일세. 하지만 여기에는 없어. 우리의 목표는 눈앞의 성경 본문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었고, 우리는 본문을 몇 시간씩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아가시가 말했던 것과 똑같이, 많이 보는 것의 차선은 자신이 얼마나 적게 봤는지 아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나는 별로 보지 못한 날이라도 그랬다. 이것은 우리가 본 것보다 볼 것이 언제나 더 많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48년 동안 성경을 읽어 온 나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의 풍성함을 보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라 보고, 보고, 또 보는 끈기가 없다는 데 있다.
1-23, --- p.472
성경은 하나님이 만물을 통해 이루시는 궁극적 목표가 영원 부터 영원까지?예정, 창조, 성육신, 화목제물, 성화, 완성?그분의 영광을 계시하고 드높이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은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 귀한 최고의 보물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 다. 즉, (첫 번째 함의가 밝힌 대로) 하나님의 무한한 존귀함과 아름다움은 우 주의 궁극적 가치이자 탁월함이다.
하지만 내가 제안하는 성경 읽기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존귀함과 아름다움?이 계시되고 드러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무한한 존귀함과 아름다움이 영원토록 드리는 뜨거운 예배를 통해 높임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와 말씀의 궁극적 목표가 그분의 존귀함과 아름다움이 최고 로 진실하고 열렬한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성 경 읽기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존귀함이 세계 전역에서 높임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이 드리는 예배 안에서 뜨겁게 높임을 받는 것이다.
1-1, --- p.70
하나님의 존귀함과 아름다움을 지극히 진실하고 열렬히 예배하는 것이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과 말씀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존귀함과 아름다움을 지극히 진실하고 열렬히 예배하는 일은 성경?과 성경 읽기?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그분의 무한한 존귀함과 아름다움을 기리는 영원하고 뜨거운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만드시기를 지향하고 바라고 기도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까? 이것이 우리가 다음 장에서 다룰 내용이다. 이 일은 성경 속 하나님의 존귀함과 아름다움을 봄으로써 일어난다. 하나님의 경이를 보지 않고는 예배 가운데 드리는 찬양이 있을 수 없다.
1-2, --- p.83
요한과 바울 모두 그리스도(하나님의 형상이신 분)의 영광을 그들의 글의 전면에 배치한다. 두 사람 다 자신들이 쓴 글을 읽는 일에 큰 중요성을 부과한다. 두 사람은 예수님을 목격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글을 읽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참으로 보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고 가르쳤다. 이것이 성경의 경이로움이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모습에서 보았던 신적 영광을 그들이 쓴 글을 통해 우리도 볼 수 있다.그들은 우리가 바로 그것을 보기를 원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고후 4:4).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는 언제나 이것을 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1-3, --- p.96
쓴맛과 단맛을 잘 섞어 단맛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음식들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성경 읽기에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때로는 그분의 존귀함과 아름다움이라는 달콤함을 먼저 일깨우지 않을 수 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 죄가 기억나고 우리 마음에 남아있는 부패를 인식하게 되면서 슬픔을 느끼게 될 수 있다. 이 고통스러운 진실을 음미한다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환영함을 뜻할 것이다. 꾸지람과 징계가 감사함과 더불어 참회와 겸손이라는 온전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이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은혜가 주는 달콤한 안도에 이르게 됨을 뜻할 것이다.
1-6, --- p.136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이 감정들에 대해 성경을 제외하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책을 썼다. 《신앙감정론》이다. 이 감정들에 대한 그의 정의는 “영혼의 경향과 의지가 더욱 활발해지고 감지될 수 있게(sensible)이다. 다시 말해, 정말 중요한 느낌은 신체적 감각이 아니라 모종의 보물이나 위협을 감지한 영혼의 흔들림이다. 의지가 어떤 것을 강하게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이 바로 에드워즈가 말하는 감정이다.
물론 영혼의 느낌과 몸의 감각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이것은 “창조주께서 영혼과 몸에 정해 두신 연합 법칙”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면 눈물이 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 때문에 몸이 떨릴 수 있다. 단순한 몸의 물리적 작용으로서의 눈물과 떨림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감사와 경외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그런 감정이 영적이라면, 거기에 따라오는 눈물과 떨림도 같은 가치를 공유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사 66:2).
1-7, --- p.159
성경이 인간의 변화와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하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신 방식은 이렇다. 우선 성경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이 영광을 본다. 영광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음미?하나님을 귀하게 여 김, 하나님께 소망을 둠, 하나님을 우리 최고의 상으로 느낌,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선으로 그분을 맛봄?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이 음미함이 우리 삶을 변화 시킨다?이기심의 노예상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게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해지면 기쁨으로 유지되고 하나님을 높이는 이 사랑의 변화를 다른 사람 들이 보고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이 과정은 신실한 그리스도의 사람들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따라 역사를 관통하여 오르내리며 이어져 왔다.
1-8, --- p.194
자연적 행위인 읽기와 읽을 때 주어지는 빛이라는 초자연적인 선물이 어떻게 교차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말할 내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성경 읽기의 목적은 초자연적인 개입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통상적인 방법은 자연적 행위로 이루어지는 초자연적 읽기이다. 하나님이 주신 초자연적인 것을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적인 것들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제 살펴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성경 읽기를 통해 보고 음미하고 변화를 받는 큰 결과들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분의 능력에 결정적으로 달려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2-15, --- p.342
성인이 된 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질문, 도처에서 끈질기게 맴돌았던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내가 실제로 살면서도 다른 분?성령?이 내 삶을 통해 결정적으로 살아가신다고 할 수 있을까? 여러 난관을 거치면서 매 시간을 이런 식으로 살아가려면 간단한 전략의 도움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내가 볼 때 이렇게 살아가는 방법을 묻는 질문에 대해 성경이 제시하는 답은 다섯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다섯 단계는 두문자어 A.P.T.A.T.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할 때 이 다섯 단계를 가장 많이 활용했다. 내 우둔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실제로 있는 영광을 보려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했다(엡 1:18). 성도들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변화가 나타나려면 우선 나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했다(고전 2:4). 그래서 다른 분의 능력으로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법에 대한 질문은 그 시기의 내게 특히 절실한 것이 되었다.
2-15, --- p.344
질문과 문제제기는 하나님 말씀의 결함을 보여 주는 증표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성경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벧후 3:16)도록 성경의 기록에 영감을 주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다. 그 어려움을 짜증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도전의식을 갖게 하는 요소로 받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금을 찾아 나선 사람처럼 질문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새 보물과 옛 보물이 있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마 13:52).
3-24, --- p.491
내 목회사역 중에서 한 가지 사례를 제시해 보겠다. 나는 우리 교회 장로님들과 함께 마태복음 18장 15-17절을 공부했었다. 이 대목은 교인 한 사람이 다른 교인에게 죄를 지었을 때의 대응법을 다룬다. 이 과정을 어떻게 진행하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분명히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본문을 실행에 옮기는 고통스럽고 골치 아픈 일이 우리 교회에서 현실이 되었다. 그 적용의 과정 한복판에서 나 는 두세 증인을 데려가 회개하지 않는 형제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과 그의 사건을 교회 전체에서 다루는 그 다음 단계 사이에 일정한 시간이 자리할 수 있음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본문을 읽을 때 미처 묻지 못한 질문이었다. “화해나 징계로 가는 두 단계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허용될까.”
나는 두 명의 교우와 함께 회개하지 않는 형제를 찾아가 권면할 때부터 그의 사건을 교회로 가져갈 때까지의 기간에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도 묻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성경 본문을 꾸준히 적용하고 순종하려 는 노력은 (‘대개’라는 단서를 달아야겠다) 그 본문의 의미에 다시 빛을 비춰 준 다. 한 본문의 의미를 적용하려는 노력은 그 본문에 대해 미처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던지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우리가 보지 못 했던 것들을 드러낸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해석의 과정과 적용의 과정을 인위적으로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둘은 긴밀히 이어져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성경을 읽을 때 저자의 의도를 더 많이 알고 싶다면 성경 본문을 실천에 옮기는 상상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성경 본문을 적용하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전에는 물어보지 않았을 많은 질문들을 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본문에 실제로 있는 것을 보는 일에서 많은 결실을 맺게 할 것이다.
3-27, --- p.539-541
성경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실패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뜻은 우주의 궁극적인 가치와 탁월함인 하나님의 무한한 존귀함과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그분의 백성들이 성경 안에서 그 영광을 보고,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탁월함을 피조된 모든 보물보다 더 귀하게 음미하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 만족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신부?모든 시대와 문화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가족?의 수가 채워지고 아름다움이 완성되어 영원히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이 성육신을 통해 완전한 삶을 사시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여 세상을 통치하게 하심으로 이 큰 구원을값 주고 사셨고 확보하셨다. 이 위대한 구원 계획을 보존하고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은 성경이 기록될 때 영감을 주시고 성경을 보존하셨다. 그리고 이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연적 행위로 이루어지는 초자연적 성경 읽기를 추구하게 하심으로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당신을 초대한다. 이 대열에 합류하라. 이것이 당신의 삶으로 세상 을 지속적으로 섬기고, 당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당 신의 영혼이 영원토록 온전히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