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가을 전두환 정권이 저지른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으로 꼽히는 ‘민추위 사건’이 벌어졌다. 이 조작 사건의 여파로 그동안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고문이 한국사회에서 공론화되었다. 고문은 국민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켜 순종하게 하고 허위자백을 받아 반정부인사를 처벌하는 데 활용되는 등 권력을 유지하는 데 요긴한 방편이었다. 전두환 집권 시절에는 모든 시국사건에서 고문이 활용되었는데, 사법부가 이를 용인한 것이 더 큰 문제였다. --- p.109
1984년 가을부터 계속 학생 운동권, 재야 단체, 야당에 밀리던 전두환은 1986년 여름부터 비상조치를 포함한 대규모 탄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9월 6일 전두환은 청와대 공보수석 이종률--- p.李鍾律)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이 수석, 우리나라의 정치상황, 안보상황, 사회상황을 살펴볼 때 정치안정이 가장 필요한 일인데 무언가 특별조치가 필요한 것 같소. 야당이 여당의 개헌안에 동의하지 않고 당리당략에 따라 학생을 선동하여 사회혼란을 조성할 때 대통령 비상조치권을 발동 안 할 수 없어요. ……” --- p.165
1987년 1월 12일 전두환은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에서 여야 합의에 의한 개헌이 실패할 경우 ‘중대 결단’을 내릴 것이라고 위협했다. 전두환은 ‘여야 합의 개헌’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실제로는 실권 없는 후계자를 내세워 퇴임 후에도 권력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연두 기자회견은 그런 그의 본심을 어느 정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입장을 좀 더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었다. --- p.240
6월 5일 국민운동본부는 ‘6·10 국민대회에 즈음하여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민 여러분! 이번 국민대회에의 동참을 통하여 진실의 힘을, 국가의 도덕성을, 국민 주권의 최고 절대성을 거짓 정권과 부도덕한 정부와 교만한 통치권자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함께 확인할 것을 호소합니다.” --- p.279
19일 아침 주한미군의 정보부대는 한국군에 동원령이 내려졌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은 한국군으로부터 위수령이 발동된다는 통보는 받지 못했다. 주한미군 정보부대는 이날 오후에 릴리 대사가 전두환을 만나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기로 돼 있다는 것을 알고, 릴리 대사에게 군 동원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CIA 한국지부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전두환은 6월 20일 새벽 4시를 기해 위수령을 선포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육군 작전참모에게 작전 명령이 하달된 사실이 확인됐다. --- p.312
6·29 선언은 전두환의 과감한 위기돌파 전략이요 고도의 정치술책이었다. 1987년 12월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됨으로써 6·29 선언은 성공하였다. 이것은 학생운동권을 포함한 범야권 세력이 그들 자신의 역량과 전두환의 역량을 오산한 데 따른 결과였다. 야권은 선거가 실시될 때 가장 중요한 능력, 즉 단일 후보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 p.350
민주화를 바라던 사람들에게 1987년 대통령 선거 결과는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전두환 정권은 유권자의 투표가 아닌 총칼에 의해 성립된 정권이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반민주적이고 정통성 없는 정권에 대한 저항과 타도 운동은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많은 사람의 죽음과 피땀 어린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면서 전두환이 지정한 후계자 노태우에게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는 정통성을 주는 것으로 귀결된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한 분노는 엄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