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5학년을 마쳤을 무렵, 농촌 생활의 한계를 절감하신 아버지는 비록 노동일이지만 서울에 일자리를 구해 식구들을 올라오게 했다. 이삿짐이라야 시외버스에 다 실을 정도로 적었지만, 서울 생활에 거는 기대는 크기만 했다. 속칭 달동네로 통하는 삼양동 빨래골 단칸방에 할아버지를 포함한 여덟 식구가 둥지를 틀고 말뿐인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물이 귀해서 수돗물이 한 지게에 5원씩이나 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산 중턱 약수터에서 길어다 온 물로 식사며 세수, 빨래 등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팔이 빠질 듯 힘들었던 물지
게 때문에 어깨에는 물집이 가실 날이 없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 가족은 빨래골을 떠나 뚝섬으로 이사했다. 뚝섬에 마련한 우리 집은 구석기 시대에나 볼 수 있을 법한 움집이었다. 전세나 월세를 얻을 돈이 없어 빈 공터를 1년 단위로 빌리고 사람 키 정도 되는 땅을 파 그 위에 비닐을 덮어 머물 곳을 만든 것이었다. 수돗물은 물론 전기도 없었다. 물은 하우스 옆에 펌프를 설치해 해결했고, 불은 일명 ‘호야’라고 하는 석유등을 밝혀 생활했다. 서울 하늘 아래 살지만, 시골보다 못한 생활이었다. 라디오나 TV 등 문화생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간혹 동네 만화방에 가서 5원씩 주고 TV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 ---p.19, 꿈조차 가난했던 어린시절
시간마다 ‘열 차렷!’ 구호에 맞춰 반복된 행동을 해야 했고, 만약 틀리면 가차 없이 주먹이 올라왔다. 맞지 않으려면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했다. ‘열중쉬어!’ 구호에 차렷 자세를 취하거나 ‘차렷!’ 구호에 열중쉬어 자세를 취하면 가차 없이 주먹이 날아왔다. 한 번 맞으면 정신이 멍하고 숨이 끊어질 것같이 아팠다. 그래도 찍소리 못 하고 아프다는 비명도 못 질렀다. 더 많은 매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조그만 방에 수십 명을 수용하다 보니 온몸 여기저기에 고름이 생기는 피부병을 비롯하여 각종 질병이 만연했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아 본 기억이 없다. 쓰라려서 미칠 것 같아도 마이신 가루를 상처에 털어 넣는 원시적인 방법이 동원될 뿐이었다. 세수도 고양이처럼 그냥 물만 바르고 다음 사람을 위해 비켜주어야 했다. 그야말로 사람으로서 받아야 할 고통은 거기서 다 겪었다. ---p.28, 소년원으로
소년원의 육중한 철문을 나서면서 나 스스로 다짐한 변호사의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변호사가 되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인노무사가 되었고, 현재는 공인노무사로서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노무사로 활동 중이다. 노무법인을 설립하고,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 HR교육원 원장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멋진 인생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최종 학력은 중학교 중퇴지만, 대학원에서 노동법과 인적자원관리에 대해 강의하고 객원교수로도 대접받는다.---p.56, 선명한 꿈을 꿔라
세상 모든 위대한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한다. 지금 하는 일에서 최고가 되려 한다면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나는 책을 읽거나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책을 사고 책을 모으는 것이 참 좋다. 책장에 책이 가득 꽂혀 있는 그 자체로 기분이 좋아진다. 사 온
책 대부분은 읽어보지만, 어떤 때는 목차만 읽고 책장에 진열할 때도 있다. 솔직히 고백해 읽기 위한 책도 있지만, 폼 잡기 위한 책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책값으로 들어간 돈만 하더라도 집 한 채는 사고도 남을 정도이다. 내가 하고 있는 주 업무가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고급 정보라서 잡지를 비롯하여 새로 나온 서적을 미리 읽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고객과의 관계도 멀어지게 된다.---p.134, 책 읽기와 공부
내비게이터십에 관한 책을 내자, 춘천소년원 원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꼭 소년원에서 특강을 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초청에 응했고, 아내와 함께 많은 원생 앞에서 내가 살아온 얘기를 했다. 지금이 힘들다고 좌절하지 말라고, 나도 그러한 과정을 통해 성장했노라고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법무부에서 만드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게 되었고, 법무부 장관과 직원들, 검찰 간부와 검사들, 소년원생과 자원봉사자들 앞에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시사회란 틀을 빌려 검찰청 강당 큰 화면에 비추어지게 되었다.---p.144, TV 특강, 명강사로 거듭나다
사람은 살면서 18세까지 부정적인 말을 14만 8천 번이나 듣지만, 긍정적인 말은 수천 번밖에 듣지 못한다고 한다.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려면 자기를 칭찬하고 자신에게 긍정적인 말을 수십 번, 수천 번 반복하여 주문을 걸어야 한다. 긍정적인 태도를 지니는 동시에 현실
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자기 주도적인 마음가짐이 바람직하다.
지금 부족한 것을 반드시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무언가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이루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기도 한다. 가난하고, 못 배웠다는 것이 어릴 적에는 상처로 남았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가난했기 때문에 악착같이 열심히 일할 수 있었고, 못 배웠기 때문에 독학이지만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할 기회를 만들었다. ---p.188, 생각이 삶을 만든다
내 학력은 중학교 중퇴에서 끝이 났지만, 스스로 독학해서 공인노무사 시험에 합격하고 검정고시와 학사고시를 거쳐 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공부 욕심, 일 욕심이 많은 탓이다. 그리고 가방끈이 짧기에 어떻게 해서든 가방끈을 늘리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모든 것이 풍족한 사람은 모든 것이 없는 사람의 절박함을 잘 모른다. 그러나 없는 사람은 하루하루의 삶이 절박하다. 내 인생 항해도 그런 절박함 속에서 무모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가난하고 못 배운 어린애가 할 수 있는 일은 몸으로 때우는 게 전부였다. 장사 밑천이 없으니 번듯한 가게를 내기도 어렵고, 그래서 기껏 생각해낸 것이 노점상, 야채장사, 행상, 포장마차, 엿장수, 고물장사가 고작이었다. 배운 것이 없으니 번듯한 직장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농장, 목장, 화물차 운전, 택시 운전이 삶의 전부였다. 가난은 불편할 뿐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지독한 가난은 나를 전과자로 만들었다. 배고픈 어린애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훔치는 것밖에는 없었다는 것이 서글픈 내 연극의 시작이다.
가난하고 못 배운 것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그 운명에 그냥 굴복하고 사는 것과 그 운명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나는 운명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로 했다.---p.227, 짧은 가방끈을 늘리다
수많은 꽃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작자의 향기를 발산한다. 다른 꽃의 향기를 시기하지도, 간섭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꽃이 지고 나면 열매를 맺어 씨앗이라는 유산을 후대에 남긴다. 사람도 각자 자신의 몫이 있고 자신의 향기가 있다. 그 향기가 아름답게 퍼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독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도 있다.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이 있는 반면, 혼자만 살려고 썩은 냄새를 퍼뜨리는 사람도 있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4가지의 향기를 갖고 있다.
기본적 향기, 물질적 향기, 정신적 향기, 그리고 사회적 향기가 그것이다.
---p.290, 삶의 향기, 그 아름다운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