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는 성악과 기악이 있는데 우리에게 친근감을 주기로는 성악 쪽이 단연 빠르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해가 쉽고 빨리 좋아질 수 있는 음악부터 듣기 시작하면 음악과 가까워지는 데 지름길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우선 오페라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들을 들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베르디의 오페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축배의 노래’, ‘아, 그대였던가’, 푸치니의 ‘토스카’ 중에서 ‘별은 빛나건만’, ‘라보엠’의 ‘그대의 찬 손’, ‘나의 이름은 미미’ 등 수많은 아리아들을 귀담아듣고 그 멜로디가 귀에 익으면, 이번엔 오페라의 서곡과 전주곡 그리고 간주곡들을 들어 보면 좋을 것이다. --- p.10
쇼팽의 음악은 깊고 무거운 의미보다는 시적이고 감상적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실제로 그의 음악은 굉장한 흥분이나 탄성보다는 고요히 우리의 마음속에 와 닿는,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쥐어짜는 듯한 감동을 준다. --- p.15
고금을 통해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리스트의 작품들을 즐겨 연주하지만, 1930년 러시아 태생으로 1970년대에 들어와 서방 세계에 그 이름이 알려지며 일약 세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라자르 베르만이 인기의 여세를 몰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 발매한 3매 1조로 된 ‘순례의 연보’ 전집 디스크는 보기 드문 귀한 명판이다. --- p.61
평생을 통해 6백여 곡을 남긴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고전과 슈베르트의 낭만 사이에서 악성 베토벤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으며, 아름다움과 즐거움 그리고 한없이 우아하고 독특한 내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40여 곡을 헤아리는 교향곡 중에서 특히 39번부터 41번까지는 걸작인데, 41번 C장조는 ‘주피터’라는 부제로 더욱 유명하다. --- p. 100
바흐를 바로크의 마지막 대가로 보는 것은 시대적 개념에서 더 뚜렷한 의미가 있다. 만일 바흐를 1685년 태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냥 그의 음악만을 통해 그를 느끼려 한다면, 그는 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게 될 것이며, 초기 이탈리아의 바로크 양식으로부터 고전 그리고 낭만에 이르기까지 변화된 내음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 p.141)
푸치니의 작곡 태도는 대단히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그는 우선 대본의 선택에 까다로웠고, 오케스트레이션의 과정에서도 악기 하나의 선택을 위해 며칠씩 소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920년 그의 나이도 이제 60을 넘기고 있었다. 이제는 돈도 많고 명성도 얻어 부러운 것이 없었지만, 그는 무언가 자신의 일생을 마감하는 거작을 만들어 내야겠다는 강한 집념 속에 최후의 작품 ‘투란도트’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 p.178
라벨이 처음으로 드뷔시와 접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나이 28세가 되어서였다. 그는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메리상드’를 듣고 크게 감동했으며, 그 후에는 드뷔시가 자주 사용하던 9도 화음, 혹은 11도 화음을 즐겨 씀으로써 드뷔시의 후계자라는 평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상징적 혹은 인상적 내음이 짙은 드뷔시는 음의 색채감을 중요시 여기며 몽상적이고도 전체적인 윤곽을 뿌옇게 흐려 놓은 데 비해, 라벨은 명확한 리듬과 질서 속에서 분명한 형태를 취했다. 따라서 언뜻 비슷한 것처럼 느껴지긴 해도 근본적인 심미관에 차이를 두고 있는 것이다. --- p.203
베버의 음악적 특성은 고고한 낭만을 통해 흘러나오는 깨끗한 서정성이라 하겠다. 음악 예술을 통한 또 다른 즐거움을 우리는 베버를 통해 느낄 수 있다. ‘마탄의 사수’를 작곡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피츠너가 말했듯이, 그는 ‘마탄의 사수’ 작곡에 너무 많은 생명의 진을 소진했던 것 같다. 그의 인기는 날로 높아지고 여러 나라에서 새로운 작품을 요구해 왔지만, 이미 그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결국 마지막 오페라 ‘오베론’을 탈고한 채 1826년 6월 5일 40세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고 말았다. --- p.241
우리 고유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우수성을 널리 전파하고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의 민요를 채보하는 데 앞장선 민족의 음악가 채동선 선생, 그는 이미 타계했지만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로 이어지는 불멸의 가곡 ‘그리워’를 통해 살아 있는 민족혼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굽이치고 있다.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언제나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고, 모든 관직을 마다한 채 초야에 묻혀 오직 예술만을 벗하며, 예술에 온통 마음과 몸을 불살라 버린 채동선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