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키치가 있었다면, 우린 아마 무척 친했을 거다. 가족 누구보다도. 할머니랑 미하루 고모가 우리 자매들을 동물원이며, 바다에 데려가주었을 때, 아주 가끔 부모님에게 이끌려 가족 여행을 할 때, 친척들이 모이는 설 명절에, 나는 어김없이 폰키치를 불러냈다. 마음속으로만 말을 건네는 거다.
‘봐, 폰키치. 저게 코끼리야. 저게 기린. 목이 길어서 우습지? 아빠가 또 흥이 올라서 취해 버렸네. 폰키치, 네가 상대 좀 해, 같은 남자니까. 폰키치, 세뱃돈 얼마나 받았어? 둘이 합쳐서 게임소프트웨어 안 살래? 너 먼저 하게 해줄 테니까.’ 이런 식으로.
그리고 지금도 만약 폰키치가 이 집에 있다면, 우리는 매일 밤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미확인 비행물체를 찾고, 비행기 수를 세고, 그것들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 추측했겠지.
--- pp.8~9
“왜 이런 걸 쓴 거야. 썼으면 썼다고 나한테 말이라도 한마디 해야지, 무단으로 남의 프라이버시를 공개하다니, 말도 안 돼. 그것도 모르고 덩달아 파티에서 싱글벙글 웃기나 하고, 사람 완전히 바보 됐잖아. 거기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내 과거를 알고 있다는 거 아냐. 아니, 그런 사람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어. 너 말이야! 료스케 씨나 마토바도 이걸 읽을지 모른다고. 남의 기분이란 걸 생각해 본 적이나 있니?”
아리코 언니는 머뭇거리지나 우물거리지도 않고 단숨에 호통을 쳤다.
아아, 들통 났구나.
--- p.60
“비밀이라니, 뭔데?”
모토코 언니가 얼굴을 들이민다. 말해도 좋을지 어떨지 망설이고 있자니 언니가 다시 말했다.
“넌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구나. 남의 관심을 끌려고 비밀 이야기가 있다느니 하고서, 정작 중요한 일은 하나도 모르지.”
“아리코 언니가 마토바 자식이랑 같이 걷고 있었어.”
눈 딱 감고 말해 버렸다. 모토코 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에서 길어진 재가 툭 떨어진다.
“어딜?” 목소리를 낮추며 묻는다. “역 앞. 우리 집과는 반대쪽으로 걷고 있었어.”
나도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젖은 이불 같았던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 p.126
“연락 왔어요, 미하루한테서.”
나와 고토코 언니는 엉겁결에 얼굴을 마주 보았다. 더구나 아빠는 우리를 돌아보며, “그렇지?” 하고 동의까지 구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였더라? 설 쇠고 한참 지나 전화가 왔는데. 남자가 생겼다고, 여행을 간다던데요. 좀 길어질 것 같아서 방도 뺐다고. 하지만 걱정 말라고. 뭐, 해외로 나갔겠죠.”
할머니는 아빠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나와 고토코 언니도 치뜬 눈으로 아빠를 응시했다. 아빠는 무릎을 달달 떨고 있다. 리모콘을 손에 들고 채널을 휙휙 정신없이 바꾸고 있다.
아빠 그건, 좀 지나쳤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할머니를 살펴보았지만, 그 이야기를 믿었는지 할머니는 살포시 웃고 나서 옆에 내려나왔던 천 가방을 끌어당겨 무엇을 꺼냈다. 세뱃돈 봉투였다. “이거 말이다. 미하루한테 건네주지 않으련. 너희 집과는 연락이 된다니.” ―<174~175쪽> 중에서
우리 이제부터 사귀는 거죠? 그 비슷한 말이다. 그러자 레이지는 어둠에서 이야기를 걸 듯 조용히 말했다. 너란 애는, 뭐든 그렇게 형태로써 확인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나 보다고.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영화 보러 가자 하면 데이트인지 확인한다, 야지마 고토코의 소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큰언니는 옛사랑이 다시 타오른 거라고 단정 짓는다, 집안 식구를 개장파와 반대파로 딱 잘라 나눈다, 우리 집에 오면 폐가 되지 않느냐고 확인한다, 하고 레이지는 말했다.
“세상일이란게 전부 그런 식으로 딱딱 틀에 들어맞기만 하는 건 아니야.”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레이지가 하는 말을 좀체 이해할 수가 없다. 키스를 했는데 사귀는지 아닌지도 결정하지 않고 아무것도 못한 채 당신을 좋아만 하면 되는 건가?
“너와 사귈 생각은 없어, 야지마.”
--- pp.295~296
나는 살며시 이해했다. 그래, 고토코 언니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가족들의 시간을 멈춰보고 싶었던 거다. 아무도 나이를 먹지 않는 애니메이션 방송이다. 채널을 맞추면 언제나 그곳에서 우스운 사건이 일어나고, 시간 안에 해결되고, 다음 주에 다시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 그 안에선 아무도 나가지 않고 아무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사랑을 모르고, 모토코 언니는 오랜 시간을 들여 쌩얼 메이크업을 하고, 아리코 언니는 하얀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미소 짓는다. 우리가 하는 일은 전부, 시작했을 때부터 끝이 나 있다고, 아리코 언니는 그렇게 말했지만, 고토코 언니는 그 반대되는 일을 하고 싶었던 거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의 반복.
아리코 언니가 마토바 자식과 함께 사라진 것도, 모토코 언니가 미팅을 접고 집에 들어앉게 된 것도, 모두 고토코 언니가 쓴 그 밋밋한 영원 속으로 섞여 들어가 버렸기 때문 아닐까. 안 그래, 언니? 나는 폰키치에게 하듯, 옆에 앉은 고토코 언니에게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말했다.
--- pp.341~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