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훤의 이름은 지금까지 견훤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옥편을 찾아보면 '질그릇·甄'에는 '견' 혹은 '진'으로 발음이 나와 있다. 그러므로 견훤이나 진훤으로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만 진훤으로 읽는 게 타당하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순암 안정복(1712~1791)이 저술한 『동사강목』은 '진훤'으로 읽어야 한다고 밝혀 놓았다. 많은 전적(典籍)을 토대로 저술한 일종의 백과사전인 『문헌비고』에도 진훤의 이름 앞 글자의 음이 '진(眞)'임을 밝히고 있다. 또 고창 병산전투와 관련된 현지 전설에서 진훤이 지렁이로 변해서 숨었던 모래를 '진모래'라고 일컫고 있다. '견모래'가 아닌 '진모래'인 점에서도 당시 그를 진훤으로 불렀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보다 분명한 것은 <완산견씨세보(完山甄氏世譜)>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우리 성(姓) 글자인 '甄'의 음은 본래 '진'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후백제의 진훤왕이 나라를 잃은 이후, 고려 왕조에서 우리 진씨가 재기부흥할 것을 두려워하고 염려하여 힘으로 항상 모멸의 해를 가하고자 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선조들은 다시는 세력을 규합하지 못하고 끝내는 나라를 일으켜 재건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우리 가문은 점점 이름을 내는 것 없이 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삶을 도모했기에, '진'음이 변하여 '견'음으로 읽었다. 그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후손들은 '견'음을 사용하였다. 그 '甄'음은 시종 한 글자였으나 변혁되었으니 모두 견씨 가문의 성쇠의 운(運)에 기인한 것이었다. 무릇 우리 후손들은 이에 의심없이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견훤이 아니라 진훤으로 읽는 게 백번 타당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이름 앞의 성으로 읽을 때는 '진'으로 불러야 하기에 진훤으로 발음하는 게 옳다는 견해도 나왔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현재 소수 성씨로서 '견'씨가 있지만 진씨가 아니라 견씨로 읽기 때문에 수긍하기 어렵다.
그러면 진훤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전설의 현장으로 달려가 보자. 진훤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아차 마을(갈전 2리)에서 출생하였다. 가은읍 소재지에서 서남쪽 국도로 나가다 좌측으로 꺾어져 다리는 건너면 금새 아차 마을의 원경이 잡힌다. 마을 앞의 아름드리 고목을 지나간다. 그러고는 오른편의 작은 시멘트 다리 금하교를 건너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고풍스러운 기와집이 나타난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이 고가의 뒤켠에는 금하굴이라는 작은 동굴이 있다. 진훤의 출생 설화가 녹아 있는 현장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사는 부잣집 딸에게 밤마다 자주색 옷을 입은 사내가 다녀가곤 했다고 한다. 그 딸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찾아온 남자의 옷자락에 바늘을 꽂았다. 이튿날 바늘에 꿰인 실을 따라 갔더니 담장 밑에 있는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춤에 바늘이 찔려 있더라는 거였다. 이 설화는 진훤이 곧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기실은 그 이름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진훤이라는 이름을 경상도에서는 '진훠이'로 읽게 된다. 이는 지렁이의 경상도 방언인 '지러이'와 서로 통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렁이를 연상시키는 진훤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 관련 출생 설화가 생겨난 게 아닐까?
--- pp. 86~88
왕건은 신라를 접수한 데 이어 백제를 무력으로써 흡수하고는 한반도의 재통일에 성공했다. 그는 무력으로 신라를 앞질렀지만, 신라의 신자로서 처신하면서 그 정통성을 승계받으려고 하였다. 그러한 의지는 920년에 백제군이 대야성을 함락하고 진례성까지 진격하는 다급한 사정에서 신라 경명왕이 구원 요청차 파견한 아찬 김율에 대한 왕건의 태도에서 나타난다. 김율은 빨리 구원군을 얻어 가려는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왔건만 왕건은 파병이 아닌 엉뚱한 질문을 했다.
"내가 듣건대 신라에는 세 가지 보배가 있다고 하더라. 장육존상과 황룡사 9층탑 그리고 성제대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나라도 망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이 가운데 불상과 탑은 아직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성제대도 그대로 있는가?"
김율이 "저는 성제대에 관하여 들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왕건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나라의 높은 신하인데 어찌 나라의 큰 보물을 모르는가?"
김율은 부끄럽게 생각하고는 돌아와 경명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경명왕이 주위 신하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는 이가 없었다. 그 때에 황룡사에 90세가 넘은 늙은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듣건대 성제대는 바로 진평대왕이 따시던 것으로 대대로 전해 오다가 지금은 남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경명왕이 드디어 남고라는 창고를 열자 갑자기 비바람이 일어나고 대낮이 컴컴해져서 찾아 낼 수가 없었다. 날을 잡아 재계하고 제사를 지낸 연후에야 성제대를 창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신라인들은 진평왕이 성골 출신이라서 그 띠를 '성제대'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 p. 293
궁예와 진훤 그리고 왕건의 생애와 그 시대에 대한 여행을 마무리 할 때가 되었다. 이 세 사람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혼신의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살았던 시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암울한 때였다. 그러나 이 격동의 시기는 신분의 껍데기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개인의 능력이 빛을 발하는 활기찬 시대이기도 했다. 골품제라는 엄혹한 억압구조가 붕괴되는 상황은 얼음이 녹는 해빙기를 맞아 만물이 약동하는 것에 비견될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가능성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한반도 안에 갇혀 있던 민족의 에너지는 국외로 발산되고, 인간이 진정한 역사의 주체로 발돋움하여 그 위대함이 시대정신을 좌우할 때였다.
--- p.310
국가를 창건한 진훤은 관부를 설치하고 직무를 두었다. 그런데 어떤 연구자는 '그 내용을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휘하에 있던 신하들이 이찬. 파진찬. 아찬과 같은 신라의 관등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을 볼 때 신라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궁예에 대해서는 관부와 관등이 신라의 경우와 상당히 차이가 난다고 하면서, 이것을 가리켜 '견훤과는 자못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라고 했다. 아울러 그 '견휜은 백제 유민들의 백제 부흥 의지를 이용만 하였을 뿐 이에 대한 대책과 배려에 힘쓰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 p.95
고려사에 수록된 왕건 선대 조상설화는 주로 김관의가 지은 '편년통록'에 근거한 거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술복적이 고려 왕실의 수호와 권위회복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목적성을 가지고 쓰여지다 보니 역사성보다는 다분히 신비적 색채로 일관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 적혀 있는 내용들에 대해서는 신중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예성강과 강화 일대에서 해상 무역으로 축적한 상업 자본주의의 힘으로 정치 권력에 파고 들어가는 과정을 분석한 것이다'라는 평가는 과연 온당할까?
--- p.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