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그분과 함께하고 싶은 나의 마음과는 달리 그분은 나를 그저 좋은 사람으로밖에 봐주지 않았었고, 그렇게 진전되지 않던 사이에, 그렇게 우린 헤어졌고, 그래서 난 많이 힘들었고, 그런 채로 그분에게서 도망치듯이 이곳 베트남 하노이로 왔습니다. --- p.14
한 작은 소녀가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소녀는 종종걸음으로 메뉴판 들고 우리 쪽으로 왔습니다. --- p.16
키는 조그맣고 얼굴은 동글상. 베트남 분들치고는 하얀 피부에 머리를 질끈 뒤로 묶은 귀여운 소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근데 완전 어린이입니다. 중학생 정도 나이로 보였습니다. --- p.18
아침마다 그 소녀가 더더욱 보고 싶어 졌습니다. 이 소녀에게 감정을 가지는 게 솔직히 두려웠습니다. 많은 사랑 실패와 그 가슴앓이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땐 그 소녀의 미소를 그리워하면서도 또 무서워했습니다. --- p.27
그 소녀는 수줍게 더듬더듬 이야기했습니다. 난 깜짝 놀랐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수줍은 많던 소녀가 먼저 다가와 주다니…. 그 소녀를 바라보며 나는 싱긋 웃으면서 당연히 괜찮다고 했고 소녀는 활짝 핀 표정으로 언제 그렇게 수줍었냐는 듯이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 p.31
전 저도 모르게 또 별명 짓기 신공이 나왔고 다른 뜻 없이 내 편하려고 나나 라고 불러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그 소녀는 나나… 나나… 두 번 되뇌더니 아주 싱그런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습니다. “I love it!” 그렇게 나나와 저는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 p.36
나나는 가방에서 노트를 하나 꺼냈고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얼굴이 벌게진 채로 노트를 펴들었습니다. 노트 안에는 한국어로 적힌 편지가 있었습니다. 전 그 편지를 읽는 나나의 모습에 그날 그 시간에 진심으로 저는 반해버렸습니다. --- p.67
스스로에게 부정하고 있었던 그 말을 전했습니다. “나도 너 좋아해.” 나나의 손목을 잡고 있던 제 손은 어느새 나나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 p.78
어느 날인가 나나의 답이 뜸해졌습니다. 나나의 전화도 뜸해졌습니다.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그런 말들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왠지 나나가 우리 처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런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그렇듯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 p.109
초이를 정말 사랑해요. 정말 좋아해요. 근데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가끔 왜 나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어요. 난 정말 평범한 여자인데…. 그게 믿음이 가지 않을 때가 많아요. 초이는 한국에 있지요. 저는 베트남에 있고요. 초이는 베트남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지요? 저는 베트남을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없어요. 여기에는 내 가족과 친구들이 있어요. 그들을 떠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해요. --- p.113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정말 현실은 현실이구나. 평범한 한국 남자와 평범한 베트남 소녀. 다시 이야기하자면, 결혼 생각이 없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자신의 위주로만 살아온 한국남자와 연애 생각 하나도 없이 일과 공부만 해오던 대학생 베트남 여자.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은 둘의 현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건 꿈. 네, 그렇습니다. 현실은 우리에게 절대 꿈을 주지 않지요. --- p.118
작고 이쁜 소녀 하나가 정말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나이 많은 남자를 좋아해 준 거, 아무도 없던 머나먼 이국땅에서 좋았던 만남, 좋았던 추억, 그리고 좋았던 그 소녀. --- p.119
저는 너무나 큰 꿈을 꾸었던 것일까요? 그 꿈은 그저 좋은 추억만 남기고 현실로 가는 발걸음을 무뎌지게 만들었지만, 저의 발걸음은 현실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드라마 같던, 소설 같던 사랑. 저에겐 없었습니다.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나를 사랑해준 나나에게 너무나 죄스러웠지만…. 저도 더 이상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