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가볍게 살고 싶지만 아무렇게나 살고 싶지는 않은’ 나의 소망에 부합하는 장르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드라마는 삶과 비슷했으니까. 드라마는 삶의 결을 가장 섬세하게 잡아낼 수 있는 형식이라고 나는 믿었다. …… 나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드라마는 삶과 비슷했지만 또한 삶이 아니었다. 드라마 PD의 삶이 멋지고 자유로울 것이라는 예상도 틀렸다. …… 드라마가 삶을 다룬다고 해서 삶을 살아내는 데 더 능숙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드라마 PD가 된 후에도 여전히 삶이 던져주는 숙제에 허덕였고, 감정적인 문제에 서툴렀다.
_「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에서
그래서 오늘처럼, 지나온 시간이 아득해지고, 이 진흙투성이 경기장에서 여전히 뛰고 있는 내 모습이 의아하고,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게임의 룰’에는 여전히 무지한 내가 한심해지는 시간에, 「그레이 아나토미」 속 전쟁 같은 경기장에 막 투입된 초보 인턴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게임은 적어도 내가 뛰는 동안에는 끝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경기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러므로 끝낼 생각이 아니라면, 경기를 뛰는 거다. 경기 중에도 쉴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고약한 룰을 바꾸어낼 수도 있다. 그의 말대로 ‘어쨌든 나는 계속할 것’이다. 그 모든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망한 거나 다름없더라도. _「그럼에도 계속 경기를 뛰어야 할 이유」에서
지민은 죽음이라는 피치 못할 조건 속에서 이별을 준비해야 했지만, 현실 속의 우리는 스스로 이별을 결심해야 한다. 살아 있는 우리가 이별을 선택하는 일도 죽을 만큼 힘들 수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별을 선택하는 일은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므로, 헤어짐의 순간 우리는 이를 악물고 ‘제1의 진실’이 마음속에서 툭, 튀어나오는 것을 목격한다. 그래서 인정하기 두려웠던 진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이별을 결심하는 것이다. _「누구의 잘못 없이도 연애는 끝난다」에서
‘어차피 혼자 사는 인생’이라며 잘난 척해왔지만, 결국 나는 그들이 쥐여준 택시비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모퉁이를 돌 때, 갈 곳 몰라 헤맬 때,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고 싶을 때…… 그럴 때마다 밥을 사주고 술을 따라주고 택시를 잡아주고 택시비를 쥐여주는 그들이 있었다. 때로는 만 원짜리 두 장이 100만 원, 1,000만 원에 비할 바 없이 큰 힘이 되었다. 사는 일이 참 녹록지 않구나 싶은 날에는 택시를 타고 집까지만 갈 수 있다면, 집에 들어가 몸을 누이고 한잠 잘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말이다. 집까지 갈 수 있는 택시비, 그것이 그 순간 필요한 전부가 아닌가. _「사촌오빠처럼 안전한 남자들」
인욱이 수정에게 ‘밥’을 대접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감동해버렸다. 볶음밥? 스파게티? 인욱이 수정에게 그렇게 물은 것은 그 어떤 프러포즈보다도 확실한 고백이었다고 느꼈다. 저 차갑고 무뚝뚝한 남자가 스파게티를 만들 줄 안다는 사실도, 저 좁은 부엌에 스파게티 재료가 구비되어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인욱이 눈가에 웃음기를 띠고 일어나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려 한다는 것이 사랑의 증거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_「사랑의 역사는 함께한 끼니의 역사」에서
나는 안다. 삼순이가 했던 짓, 그러니까 상대방의 휴대폰을 뒤지고, 미행하고, 불쑥 그의 회사 앞으로 찾아가는 것 같은 일이, 겉보기에 멀쩡한 사람에게도 충분히 가능할 일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혼자됨을 예감할 때 우리를 압도하는 그 두려움의 존재를. 외로움에 대한 공포를. 사랑이 변했음을 인정하는 냉정함에 앞서, 또 혼자가 될까봐, 기껏 찾아낸 이 남자가 또 나의 짝이 아님이 판명이 날까봐, 저 남자가 내 반쪽일까 그 남자가 내 반쪽일까 쉴 새 없이 눈과 머리를 굴려야 하는 그 지난한 나날이 또 시작될까봐, 그냥 겁이 나버리는 상황 말이다. 혼자됨에 대한 두려움이 순식간에 이성을 마비시키는 그런 순간 말이다. _「운명의 짝은 어딘가에 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니, 그들의 연애가 독고진의 심장 수술대 위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어졌다. 사실 진짜 사랑은 현실 속에서 싹트는 것이니까. 그러니 그들의 연애가 시작된 곳은 아마 주유소였을 것이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장소에서 ‘저 오만하고 독선적인 재수탱이는 누구야?’라고 구애정이 의식한 순간부터, ‘허락도 없이 내 차에 기대는 저 허접한 여자애는 누구야?’라고 독고진이 의식한 순간부터, 진짜 살아 있는 현실로서 상대가 내 마음속에 각인된 순간부터. …… 그러니, ‘우리는 운명일까?’라고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운명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니까. 운명이기 때문에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운명이 되는 것이다. _「결과적으로, 운명」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