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생. 어릴 때부터 공상하고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여섯 살 때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사기꾼’이라는 답을 적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을 만큼 엉뚱하고 사고력이 풍부한 아이로 자랐다. 책 읽기보다는 직접 글 쓰는 것을 좋아해 때때로 삶이 이해되지 않을 때는 일기장을 꺼내 하소연하기도 하며 성장기를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독후감 공모전, 백일장 등에서 상이란 상을 죄다(?) 쓸며 일찌감치 글 쓰는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대학 입학 후에는 방에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매일 밤 세상을 떠도는 꿈을 꾸며 세계여행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 이 정도면 다 컸다고 자만하게 되었을 때쯤, 스스로의 성장을 마무리하기 위해 카메라와 일기수첩, 배낭을 메고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홀로 여행을 떠났다. 소설가가 될 것이라는 부모님의 생각과 달리 지금은 잠시 인생을 탐험하는 탐험가로 지내고 있다.
그렇게 나의 킬링타임용 아이팟은 무책임하게 떠나갔다. 위자료를 물을 수 없는 이별이라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당장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여행 정보를 활용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화가 나지만, 지금부터 12시간의 비행시간을 어떻게 참아낼지 암담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의 12시간을 생각해본다. 꽤 그럴듯한 생각을 했다고 칭찬하지만 딱히 달라지는 건 없다. 같은 시간이 언제나 같은 가치를 지니긴 힘든 건 나도 안다. ---p.51
파리가 어떠냐고 묻는 친구들에게는 파리는 냄새나고, 더럽고, 예의 없고, 무섭고, 짜증 나고, 아름답다고 얘기해 주었다. 앞의 여러 개의 수식어와 ‘아름답다’ 중에 어느 것이 더 파리의 실체와 가까운지는 설명하진 않았다. 다만 모든 수식어가 같은 뜻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p.57
모든 짐을 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홀로 떠나는 여행은 매력적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채 무책임하게 떠난다는 사실 그 자체로 더 많은 짐을 지우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쌓여온 답답함을 여행을 통해 비워놓는 일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 다시 남은 쓰레기를 주워담더라도 일단은 가득 차 있는 쓰레기통을 비워야 했다. 어차피 내가 담아야 하는 거라면. 어쨌든 여행은 무언가를 해결해주고 갔다. 기억으로 남은 건 우리 동네 찜질방과 다를 바 없는 홍성 온천뿐이지만. ---p.147
갑자기 아프다고 생각하니 서러워진다. ‘여행 중에 아프면 서럽다던데’를 생각해서 더 그렇다. 때로는 자기가 감정을 느끼기 전에, 이미 선행된 타인의 경험들 때문에 순간의 느낌이 지배당하기도 한다. ---p.164
세계가 모두 다른 시간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자연 섭리보다 당연한 것이면서도 굉장히 낯설게 전해진다. 마치 내가 다른 이보다 과거의 시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래 봤자 24시간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낮 시간의 이동 버스는 끔찍이도 느린 시간에 걸쳐 있다. ---p.186
정말 행복할 때는 로또를 사러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로또가 당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나에게도 불행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싶다. 행복이 지나치면 언젠가 불행이 닥칠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한다. 로또를 통해 행복의 균형을 맞추는 건 꽤 좋은 방법인 것 같다. ---p.201
나는 담배도 술도 하지 않는 중동 남고딩과 페이스 북이 차단된 시리아에서 페이스북을 하는 중동 여고딩과 헤어졌다. 시리아에 온 첫날 그랬다. 너무 더워서 실신할 것 같았다. 더위가 나에게 ‘이게 바로 중동이다. 이 조무래기야’ 하는 것 같았다. 지금 따뜻한 비가 창 밖에 내린다. ‘이게 중동이다. 이 조무래기야’ 같은 말을 반복한다. 꽤 긴 텀을 두고서 그 텀 사이에 어쩐 일인지 더위가 따스함으로 바뀌었다. ---p.235
그동안 고생했던 나날들이 이집트에서 마지막 점으로 남는다. 이런 생활은 오늘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아쉬워진다. 좀 더 나를 굴릴걸. 매일 밤 불편한 잠자리에 짜증으로 잠들던 일도 이제는 일기로만 남는다. 나를 죽일 듯한 무더위도 53이란 숫자로 남는다. 탄자니아에서 먹었던 바나나 찜 요리도 추억으로 남는다. 여기서 만난 형 누나들은 한국에 가서도 남아 있을까. ---p.269
영국으로 날아올 때 벌었던 시간만큼 철저하게 빼앗긴다.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적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돈이 아니니까. 결국 내가 시간으로부터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신에 시간은 흐르는 만큼의 기회를 넘겨주었다. 그다음은 온전히 내 몫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세월이라는 이름으로 쌓였을 때, 우리는 돌아보겠지. 다시 세월이 흘러 히드로 공항에서 미친 듯이 잠을 잘 때, 나는 돌아볼 거야.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회가 흘렀고 흘려보냈나. ---p.273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나는, 그러나 어른이 되어 가고 말았다. 기다려왔던 어른이 된다는데 이유 없이 울컥해진다. 그렇다면 나는 행복한 어른이 되고 싶다. 사진 몇 장과 일기로 남은 여행이 ‘너는 지금 여기에 행복하게 기록된 것처럼, 앞으로도 행복할 수 있어’라고 위로한다. 더 이상은 아무에게도 핑계하지 않는다. 여행은 끝이 났고, 행복해지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