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은혜를 입었다고 하면 어떤 행동이나 행위로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행위를 통해 베푼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한 번의 행동으로 은혜를 베푸시고 끝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곧 은혜의 중심이고, 은혜의 근원이며,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이 곧 은혜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야 은혜와 마주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만날 때 은혜가 임하게 된다. --- p. 14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연약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실수와 실패로 힘들 때,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폭풍을 지나며 견디기 힘들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셔서 새롭게 하시고 치유하시며 힘을 공급해 주신다. 다시 일어서서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하신다. 그 감사의 근원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 pp. 35-36
겸손의 중요성은 알겠는데 실천하기는 힘들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한계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은혜가 임하는 통로인 겸손으로 향해 가야 한다. 어떻게 겸손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사람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겸손할 수 없다. 성 어거스틴도 신앙생활에 필요한 덕목으로 무조건적인 겸손을 꼽았듯이 겸손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 그럼에도 우리가 드리는 수많은 기도 가운데 겸손함을 구하는 경우가 적다. 아예 그런 기도를 드리지 않을 때도 많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고 가장 약한 자로 엎드리며 그분의 평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보답에도 흔들리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더 크고 높아지려고 하지 않는 겸손함을 구해야 한다. --- p. 117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은혜의 언어로 자신을 나타낸다. 언어가 마음의 창이요 인격의 창이요 은혜의 창이기 때문이다. 은혜 입은 자는 감사가 넘쳐 나고 감사가 넘쳐나는 삶에 은혜가 임한다. 그렇기에 은혜의 말은 감사를 담은 말이다. 감사의 반대는 불평이다. 그래서 불평하는 말을 한 자들이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일이 없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말 가운데 부정적인 마음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그 마음에 은혜가, 감사가, 믿음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는 감사의 말을 해야 한다. 감사를 전하고 감사를 하는 말이 필요하다. --- pp. 124, 132
은혜의 통로로 쓰임 받는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다윗이 사울의 가족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한 뒤 남은 가족을 찾았다. 다윗은 사울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자 당장에 찾아보라 명령한다. 므비보셋은 다섯 살 때 유모의 품에 안겨 쫓겨 가다가 잘못하여 유모가 떨어뜨리는 바람에 두 발을 절게 된 불구자였다. 그런 그를 다윗은 찾았다. 이유는 하나,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였다. 므비보셋이 잘생겼든 지혜롭든 능력이 출중하든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다. 사울의 가문에서 어렵게 살아남은 므비보셋을 불쌍히 여길 뿐이다. 바로 이것이 은혜를 보는 눈이다. 어떤 조건도 따지 않고 그저 은혜로 바라보는 눈이 은혜를 보는 눈이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기뻐하셨다. --- p.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