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계통의 주간지와 월간지의 기자로 일하면서 좋은 사람들과 만나 교회에 대해, 또 신앙에 대해 배웠다. 글을 쓰고, 쓴 글을 모아 책을 내고, 방송 잡지 신문 등에 출판 평론을 하면서 책의 매력에 빠졌다. 그러다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 작가의 길에 접어들면서, 책에 더하여 영화 드라마 음악 미술 등의 콘텐츠들을 재료 삼아 신앙, 역사, 직업, 글쓰기 등을 요리해 내기 시작했고, 이렇게 만들어 낸 요리를 블로그와 매체와 강연과 책으로 펼쳐 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글 요리’가 화려하거나 자극적이거나 압도적이지 않더라도 오래 두고 맛을 깨닫는, 오히려 맛조차 기억할 수 없는, 한 공기의 밥 같기를 바란다. 그동안 낸 책으로 《사랑의 향기 신앙의 향기》(홍성사, 2003) 《세상에는 이런 주일학교도 있다》(브니엘, 2004)와 공저로 《그 사람에게 가는 길》(대한기독교서회, 2011) 《이런 교회-큰나무교회 30년의 이야기》(토기장이, 2015)가 있다.
나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난 뒤, 마흔이 넘은 어느 날 아버지가 흥얼거리며 부르던 노래를 문득 기억해 냈다. [아주까리 등불]이라는 노래다. “피리를 불어 주마 울지 마라 아가야”라고 시작되는 이 노래는 “산 너머 아주까리 등불을 따라 저 멀리 떠나가신 어머님이 그리워”라는 노랫말로 이어졌다. 이 한 곡을 오래오래 곱씹어 들으면서 나는 비로소 아버지가 살아온 세월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 어린 아버지가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했을지, 배고파하는 동생을 고아원에 남겨 두고 홀로 도망 나온 뒤 다시 찾아가지 못한 죄책감은 또 얼마나 무거웠을지, 온 나라를 눈물바다로 만든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서 어릴 때 헤어진 동생을 만나자마자 그저 말도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던 아버지의 그 눈물이 실은 당신이 살아온 모든 세월의 무게였음을, 나는 조금씩 알아 가기 시작했다. ---「1부_슬픔이라는 거울 / 슬픔 하나_아! 아버지 / 헐렁하고 퀴퀴한 아버지의 구두」중에서
사랑하는 어린 딸 카나코를 떠나보낸 엄마는 그토록 예쁘고 귀엽고 깜찍하던 딸 카나코가 교통사고로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 어떻게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딸을 떠나보낸 애틋한 엄마의 시간을 그려 낸 영화 [벚꽃, 다시 한 번 카나코] 이야기다. …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단순한 이별의 슬픔이 아닌, 존재 그 자체가 지워져 버리는 슬픔을 감수하는 일이다. 사라지거나 지워지지 않고 어딘가에서 꽃처럼 활짝 피어날 것이라는 믿음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우리의 슬픔은 그 무게가 훨씬 가벼울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른다. 해마다 봄이 오고, 다시 꽃이 피어나는 까닭은…. ---「2부_간절한 소망 / 소망 둘_그리움, 영혼에 스미는 마음 / 저렇게 흐드러진 벚꽃들 속에서」중에서
정현종의 시 [방문객]의 한 대목처럼 한 사람을 이해하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게다가 그가 살아갈 날들까지 생각하면, 그에게는 또 얼마나 많은 신비로운 시간이 열려 있는가? 그래서다. 어떤 인생에게나 삶은 우주처럼 신비로워서 사람의 지식이나 오감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다. 오동나무가 비를 맞고 눈을 맞으며 단단해지고 여물어지듯, 한 사람의 인생도 사랑 실망 절망 가난 외로움 배신 등 온갖 시간들을 지나온다. 한창 자극적인 이야기를 찾아다닐 무렵의 나는 평범하고 밋밋해 보이는 이야기에 마음이 가지 않았다. ‘굵고 짧게’ 아마 그런 말을 곧잘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한 사람을 오래 만나면서 자극이란 것이 사라지고, 맛으로 치면 싱거워져 버린 뒤에야 나는 그에 대한 깊고도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3부_알 수 없는 신비 / 신비 셋_그래, 삶은 기적이야 / 인생이라는 순례의 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