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짜백이와 무대뽀
문맥적 의미 파악의 양적 진실
영어 교수이론의 많은 대가들이 있습니다만, 오늘 어휘 공부와 관련해서는 특히 David Nunan이라는 분의 서적을 참고하려고 합니다. 기존의 방대한 내용을 잘 정리해서 실용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지요. 아마 영어 선생님들은 Practical English Language Teaching이라는 책을 한권씩 다 가지고 계실 겁니다.
단어를 생짜백이로 그냥 외우지 말고 반드시 문맥을 통해 익혀야 한다는 말, 많이 들어보았을 겁니다. 좋은 얘기고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자, 그래서 재미있는 동화책 하나를 선정해서 읽기로 했다고 칩시다. 읽혀지나요?
아닙니다. 분명히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구입했는데 딱딱하고 졸리기만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학자들에 의하면 문맥적으로 어휘의 뜻을 유추해내기 위해서는 주어진 읽기 자료의 어휘 중 98퍼센트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만일 그게 50단어짜리였다면 모르는 단어는 안정적으로 한 개까지만 허용된다는 얘기가 됩니다.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이 치르게 되는 수능영어를 예로 들자면 독해문제 한 지문 당 모르는 어휘가 최대 두세 개 정도만 허용된다는 말이지요. 그 이상이 넘어가 버리면 확률적으로 해당 지문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할 가능성이 현격히 떨어진다는 겁니다. 물론 이 역시 사람마다 시쳇말로 촉이 다르니까 일률적으로 적용되기에 무리가 있기는 하겠지만, 통계적으로 어느 정도 확립이 된 내용이니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적 아버지께서 보시던 두꺼운 시사 월간지를 화장실에서 큰일을 볼 때마다 힘주며 들여다보던 기억이 납니다. 분명 다 한글인데,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죠. 완벽한 한국어 화자임에도 불구하고 전부 다 한국어로 된 텍스트를 읽기에는 여실히 부족함을 드러냈던 장면입니다.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어느 날 갑자기 그 내용들이 읽는 대로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분명히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인데도 무슨 뜻인지 대충 윤곽이 잡히기 시작하더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어느새 나머지 98퍼센트의 의미를 알고 있는 지식인(?)으로 성장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깟 2퍼센트 정도의 무식함이야 무리 없이 소화를 시킬 수 있었던 겁니다. 머리가 트이기 시작한다고 하나요? 그때부터 다른 공부들도 갑자기 잘 되기 시작하더군요. 돌이켜 보면 부모님들이 ‘그 집 아들 공부 잘해서 좋겠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기 시작한 게 제 기억에 바로 그 미지의 2퍼센트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시작한 그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너무나 당연한 본능의 일부로 여기지만 세상의 모든 학문이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2퍼센트의 장벽을 극복하는 신기로운 경험은 비단 영어공부에만 한정된 얘기는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생짜백이와 무대뽀는 과연 필요한가
그러면 모르는 것 빼고 그 나머지 98퍼센트는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아마 대부분이 공감하는 과거의 학습 경험일 텐데요. 영어 단어와 한국어의 일대일 매치 무대뽀 생짜백이 암기법 말입니다. 그 지겹던 단어 시험을 대비하며 무수히 했던 것들이죠. 어찌 보면 인간의 감성을 무시하며 오직 우리 뇌의 좌반구(left hemisphere)만을 혹사하여 보냈던 그 나날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도 생기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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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in 유럽산 지빠귓과 울새속의 총칭
blackbird (유럽산) 지빠귓과의 명금(鳴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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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in과 blackbird는 영미인들에게 아주 전형적인 새의 명칭들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지극히 보통스러운 명사들입니다. 사실 이런 단어를 익히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새들을 최소한 그림으로라도 눈앞에 보여주면서, “이게 바로 robin이고, 이게 바로 black bird야”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했습니까? 계속 중얼거리고 백지에 써가며 ‘유럽산 지빠귓과 울새속의 총칭, 유럽산 지빠귓과 울새속의 총칭, 유럽산 지빠귓과 울새속의 총칭 …’ 혹시 이렇게 외우지 않았나요? 머리 따로, 마음 따로, 손 따로, 눈 따로, 이렇게 말이지요. 가공할만한 위력을 지닌 우리의 두뇌에 이 단어들의 대상물(referent)이 전혀 떠오르지 않도록 말입니다. 당연히 이런 식의 무대뽀와 생짜백이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방법입니다. 스트레스만 가중시킬 뿐이지요.
하지만 그와 같은 무식한 상황만 아니라면요 이 소위 말하는 생짜백이 번역식 암기법을 꼭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가령 ‘student=학생, elephant=코끼리, teacher=선생님, giraffe=기린’과 같은 일대일 매칭 암기를 결코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는 거지요. 사실 생짜백이로 구구단을 외웠기에 나중에 수의 개념들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학습의 초기에 이유도 뜻도 없이 무엇인가를 암기해야만 하는 시절을 꼭 필요로 합니다. 아까 David Nunan이라는 교수님을 잠깐 언급했었지요? 그 분 책에 보면 이런 무대뽀식 암기를 의도적 학습(deliberate learning)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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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 the other strands, no more than 25 percent of the course time should be given to this particular strand. It is an essential strand of a course but it should not overwhelm the other strands.
다른 방법들처럼, 수업의 25퍼센트 이상이 이 특정 방법에 할애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수업의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기타의 요소를 압도해서는 좋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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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다는 얘기 같지만 교수님의 설명을 잡 곱씹어 보면, 적어도 수업의 일부는 의도적인 학습에 할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또 이러한 단계는 필수적(essential)이라는 겁니다. 이를 우리들의 어휘 공부에 적용시켜 보면 어떨까요? 적어도 우리 실정에 최소한 2~3천 어휘 정도는 이런 식으로 시작해도 나쁘지 않다는 얘기가 됩니다. 대체로 학원 앞을 지나다니는 중고등학생들이 테스트에 대비하며 이렇게 외우며 다니는 것 같은데요, 생짜백이와 무대뽀식 단어 암기법이 결국은 어느 정도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 목적이 2퍼센트를 잡기 위한 98퍼센트의 용량 확보라는 대의를 잊으면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그간 해왔던 이런 공부를 너무 폄하하거나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간 잘 해왔던 겁니다. 다만 꿰어지지 않은 구슬이 되어 따로 놀았던 것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외울 것이며 어떻게 외울 것인지를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