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화자의 두렵고 암울하며 답답한 마음, 애간장이 끊어지는 서러움을 토로하기 위해 작가는 시의 연을 나누지 않고 속마음을 줄줄 풀어냅니다. 화자의 생각을 전개가 빠른 영상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주지요. 특히 우리는 “내가 괭이질하던 밭”과 “내가 괭이 씻던 실개천”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그의 모습에서 국가의 야욕이 보통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어떻게 산산조각 내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화자의 슬픔은 이어 분하고 분한 마음이 됩니다. 그는 “내 어찌 분하지 않겠는가, 국가를 위해서다, 군주를 위해서다”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개인이 거대 권력의 손아귀에 휘둘려 자신이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와 상관없이 생의 소멸 과정으로 진입할 때의 분노를 읽게 됩니다. ---- p.39
위의 시에 나오는 “근심하며 울며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지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투가 벌어진 상황이 아닌데도 ‘국민의 의무’라는 명목으로 아들을 군대에 보내본 한국의 엄마들이라면 더욱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훈련소에 입소한 뒤 개인 소지품과 손 편지를 넣어 집으로 보낸 커다란 박스를 받아들었을 때 우리 어머니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렸던가요. 그 아들이 만기 제대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까지 어디 다리 한 번 쭉 뻗고 잠들었던 적이 있던가요? 두 아들을 군대에 보냈던 경험이 있는 필자 역시 군대에 간 아들 걱정에 두려운 마음을 감추느라 일감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제대하여 집으로 돌아올 시각이 코앞인데도 공연히 불안한 마음에 수없이 빨래를 널고 또 널었습니다. 하물며 전쟁터에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매 순간, 생과 사를 넘나드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 p.48-49
젊은 부부에게도, 엄마와 아들 사이에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감성이 서로 오가고 있었을 테니까요. 서로 보살펴주는 ‘사랑’이 그 안에 있을 때, 그곳이 어떤 곳이라 하여도 인간에게는 최고의 보물이 숨겨져 있는 궁전입니다. 물질이 흐드러지도록 풍요로운 현대에 살면서도 정신이 메마르고, 우울병이라는 전에는 잘 알지도 못했던 병에 사람들이 시달리는 것도, 꼭 필요한 ‘사랑’의 감정이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것, 변변치 않은 음식이라도 같이 나누어 먹는 기쁨, 서로 칭찬하며 격려해주는 대화, 그 모든 소소한 것들을 앗아 가버렸습니다. 그러한 일상이 없어진 곳을 비추는 달빛도 힘이 없어 희미한 그림자뿐이겠지요. --- p.53-54
열차가 출발하는 순간 사람들은 ‘망연히 서서’ 배웅하고 있습니다. ‘망연히’라는 시어에서 배웅하는 사람들의 정신과 혼이 다 빠져나갔다는 것이 전해옵니다. 살아 돌아오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의 마지막 작별의 모습을 시인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세’를 부르는 사람은 늙은 차부車夫뿐입니다. ‘만세’를 부르며 모자를 힘차게 흔들었을 것 같은 늙은이는 전쟁터로 떠나는 젊은이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려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저승 가는 젊은이에게 빌어주는 간단한 위령기도의 주문 같아서 더욱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98-99 “열차와 손수건”에서
일본 침략군은 무고한 한국인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고 부르며, 재판에도 넘기지 않고 학살했습니다. 이 시는 그러한 처형에 의한 살인행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총살 집행을 명령받은 하급 병사들 전원이 일부러 목표를 빗겨간 행위에서 시인은 선량한 일본 인민의 양심을 암시하고 있 습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하며 웃음 짓는 ‘조선인’을 참살하는 일본 직업군인의 잔인함은 “히쭉 웃었다”라는 시구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 p.122
역시 미쓰하루는 ‘시인’입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도 군대에 내보내지 않았으나, 아들을 군에 보내고 잠을 설치는 부모의 심정을 그는 「후지산」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어디에서 어떤 모양으로 지내고 있는지 모르는 부모의 속 타는 마음은 걱정을 하다가 잠시 잠이 든 시간에도 아들이 꿈에 보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비에 흠뻑 젖어 “총을 질질 끌면서, 헐떡거리며” 얼이 빠져 걷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힘없이 걷고 있는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서 정처 없이 찾아 헤매던 꿈을 꾸고 난 날 밝은 새벽녘 “아들이 없는 텅 빈 하늘에” 후지산이 보입니다. --- p.141
전쟁이 끝난 세계를 황량한 들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힘겨운 형벌의 포차砲車를 밀면서/ 피의 강을 건너갔던 병사들”의 죽은 혼이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병사인 ‘나’도 아름다운 마을이 보이는 것도 필요 없고 ‘고독’ ‘쓸쓸함’ ‘슬픔’ 들을 끌고 절망도 희망도 없는 곳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살았다 해도 사는 것이 아닌 병사 ‘나’는 승리와 패배는 처음부터 의미도 없었던 터라 안전장치를 풀은 방아쇠를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전쟁이란 “죽음의 수확”일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오직 ‘허무’에 잠 긴 병사는 방아쇠를 자신에게 들이대려 합니다. “그대들이 없는 어두운 하늘” 밑에서 살아남은 병사 또한 그의 혼이 죽은 자나 마찬가지로 “흙에 깊이 내려박히고” 있습니다. 연도 나누지 않고 써내려간 병사의 노래입니다. 병사는 증오나 분노보다도 더한 깊은 생의 상실감에 빠져 있는 것이 전해옵니다.“ --- p.173-174
3연에서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모르고/ 맑은 눈빛만 남기고 모두 출발해버렸다”고 시인은 한탄합니다. ‘맑은 눈빛’이라는 시어가 무엇보다 애잔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의 로미오의 눈빛일 것입니다. 20대의 순수한 청년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 그 눈빛에는 가문?혈통?재물?국경 등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가슴이 벅찬 청춘만이 가질 수 있는 그 ‘맑은 눈빛’이 아직 살아 있는데 그들은 전쟁터로 ‘모두 출발’해버린 것입니다. 여인이 사랑할 상대들이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떠나야 했던 비극을 시인은 거칠게 읊고 있지 않는데도 가슴이 아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