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를 다정하게 쓸어주는 재열을 바라보며 해수가 물었다.
“너… 나 사랑하니?”
“어.”
해수는 재열의 눈빛이 너무 뜨거워 얼굴을 돌렸다.
“안 믿어. 그리고 난… 아직은 아냐.”
“괜찮아. 결국엔 그렇게 되겠지. 근데, 왜 울었어?”
해수가 재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괜한 어리광이 부리고 싶었다. 그의 말이 너무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잠깐 멈췄던 눈물이 다시 고이기 시작했다.
“어떤 생각이 났지.”
“어떤 생각?”
“나중에… 내가 진짜진짜 널 사랑하게 되면 그때 말해줄게. 내가 오늘 어떤 생각이 났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나쁜 앤지도 그때 말해줄게. 그때 가서도 네가 날 사랑한다고 하면 그때 믿을게, 네가 사랑한다고 한 말. 근데 난… 오늘은 아냐.”
사랑도 믿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해수가 재열은 밉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해수의 눈엔 사랑이 가득했다. 재열은 말보다 더 진실하고 믿을 수 있는 건 눈빛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해수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기다려주리라 다짐했다. 이 순간 재열은 해수의 모든 게 사랑스러웠다.
“그래도, 난 사랑해.”
재열이 따듯한 눈으로 해수를 바라보며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 p.11~12
출소를 일주일 앞둔 재범의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처음에는 갇힌 공간이 답답했지만, 너무 오래 지낸 탓인지 여기 아닌 다른 곳에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함께 지내던 교도관이나 동기들과 헤어지는 것도 아쉬웠다. 그러다가도 밖에 나가면 그간 누리지 못한 자유를 맘껏 누리며 가고 싶은 곳 다 갈 수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다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문득, 지난 귀휴 때 잠시 보았던 서울 거리가 떠올랐다. 화려한 불빛과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하지만 그 속에서 혼자 낯설어하고 어색해하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출소에 대한 기대는 두려움에 잠식당하고 말았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으면 어쩌지, 갈 곳이 없으면 어쩌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자신을 감방으로 내몬 재열이 더 미워졌다. 그리고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는 어떨까.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배신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나를 밀어내면 어떡하지? 아냐, 14년 동안 매주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면회를 온 엄마인데, 날 반겨줄 거야. 그래, 엄마는 날 품어줄 거야….
--- p.91~92
“1년 동안 넌 날 잊으려고 최선을 다해. 그러고도 못 잊으면, 다시 와서 보자. 나한테 연락하지 마. 내 성격 알겠지만, 난 연락 와도 안 받아. 오늘 이후로 난 네 면회 거부할 거야. 네가 의사랍시고 와서 회진을 돌면, 병원을 옮길 거고.”
재열의 눈가도 붉게 물들었다. 재열은 마음이 아파도 계속 그랬던 것처럼 담백하게 말했다.
“넌 나 떠나보내는 게… 쉬워?”
“어려워. 근데 어려운 걸 이겨야, 나중에 네 가족한테 나도 할 만큼 했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여행 가서 딴 남자 만나면?”
해수는 자기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다.
“난 딱 네 스타일인데, 만약 그럼… 내가 착각했구나, 잘 살아라 지해수, 할게.”
파르르 떨리는 해수의 입술과 붉게 물든 눈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 재열이 해수의 두 손을 따뜻하게 잡아 쥐었다.
“난 누구한테도 너 양보 안 해. 내가 너 때문에 강우의 존재를 찾았듯, 넌 나 때문에 안식년 갖고, 더 크게 성장해서 돌아와. 이제 가.”
잡았던 손을 놓자 해수가 재열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너… 나한테 안 져줄 거지?”
재열은 해수에게 마지막 입맞춤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막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손으로 훔쳐내며 해수가 입을 뗐다.
“1년 후에 다시 만날 때, 딴 여자 옆에 두면 죽어.”
“너 같은 멋있는 여자를 1년 만에 잊을 놈이면, 그냥 갖다 버려.”
“넌 네가 진짜 못돼 처먹은 거 아니?”
--- p.248~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