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우는 영 찜찜하다는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단도를 들어 그의 오라를 풀었다. 그가 오라를 풀자마자 누르하치는 마치 한 마리 표범처럼 순화에게 뛰어들어 그의 목을 콱 짓눌렀다. 이에 순화는 별 도리 없이 그의 무거운 몸에 짓눌려 켁켁 댔다. “마, 마마! 이, 이런 무도한 자를 보았나! 은혜를 원수로 갚아?” 당황한 곽재우가 급히 장검을 빼들어 치려고 했지만 순화는 손짓으로 극구 말렸다. 그러자 곽재우는 억센 악력으로 누르하치를 떼어 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호위병 몇 명이 달려들어 그를 떼어 냈다. 겨우 그를 떼어 낸 곽재우는 팔꿈치로 그의 명치를 가격해 자리에 앉혔다. 그래도 그가 계속 덤비려 하자 다시금 오라를 묶었다. 순화는 목을 감싸 쥐고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하, 하하……. 이런 자는 또 처음이로세. 꺾일 줄 모르는 자로군.” “영정경! 뭘 더 볼 것이 있습니까. 이런 치졸하고 인정을 모르는 자는 당장 베어 효수해야 합니다!” “아니오, 아니오. 맘에 들었소. 하하하!” 이렇듯 호탕하게 웃는 순화를 보는 누르하치의 표정이 증오에서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자신을 해하려 한 자를 두고 그리 웃는 자는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순화는 확실히 그의 억센 손에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상당히 그가 마음에 들었다. 쉽게 굴복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순화는 상당한 매력을 느꼈다. 그는 술잔 대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은 뒤, 누르하치를 향해 말했다. “그대, 내 밑으로 들어오라고 한다면 극구 거부하겠지?” 이를 통역관이 통역해 주자 누르하치가 불같이 화를 내며 여진말로 뭐라 외쳤다. 이를 통역관이 민망한 표정으로 통역했다. “개, 개나 다름없는 자의 밑으로 들어가느니 차라리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겠답니다…….” 순화는 더욱 재밌다는 듯 통쾌하게 웃었다. 이런 신랄한 비난은 고등학생 시절 영 오르지 않는 수학 성적에 자신의 수학 과외를 맡아 주었던 선생이 ‘너 같은 수학 꼴통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다.’라고 말했던 이후로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자신을 향한 비난조의 말을 들으니 순화는 화는커녕 더욱 기뻐했다. “좋다, 좋다. 그런 기백이 좋아. 상당히 그대가 맘에 든다.” “흥, 웃기는군. 이젠 별 젖내 나는 놈까지 나를 무시하려 들다니. 이 누르하치의 위명이 정말 하잘 것 없어졌구나.” “적진에서 태연할 수 있는 자, 그 이전에 나 순화군 앞에서 욕지기를 퍼부을 수 있는 자, 당장 죽더라도 할 말은 하는 자로다.” “…….” “나는 그런 그대가 상당히 마음에 든다.” “…….” “그대는 나를 어찌 보는가? 그저 그대의 친우를 살육한 못된 어린 아이로만 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