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 스님 발자취》
동곡당(東谷堂) 일타(日陀) 대종사(大宗師)의 간추린 행장
1929년 충남 공주에서 아버지 김봉수와 어머니 김상남 사이의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셨다. 5세 때 마을로 탁발을 나온 스님을 따라다니며 《천수경》과 《반야심경》 독송하는 소리를 듣고 바로 외우는가 하면, 천당 지옥 극락 등의 이야기와 인과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믿었으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마음에 깊이 새길 정도로 불연이 깊었다.
14세에 공주의 본정공립학교를 졸업했고, 친가 및 외가의 식구 41명이 모두 출가하자 역시 그 뒤를 이어 통도사의 고경 스님을 찾아가 출가득도했다. 17세에 통도사 사립중학교를 졸업했고, 18세에는 송광사 효봉 스님 회상에서 첫 하안거를 시작함으로써 참선의 길로 들어섰다. 21세 되던 1949년에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마친 스님은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했으며, 이듬해부터는 운수납자의 길로 들어서 금오, 동산, 성철 스님 등을 모시고 정진했다. 1953년에는 자운 율사의 권유로 통도사 천화율원(千華律院)에서 율장선서를 열람하고 계법을 정립했으며, 이후 율사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6세 되던 1954년에는 오대산 서대에서 혜암 스님과 함께 생식과 장좌불와로 하안거를 마친 뒤 적멸보궁에서 7일간 하루 3천 배의 기도를 하고, 엄지를 제외한 오른손 열두 마디를 연지연향(燃指燃香)했다. 그 후 경북 봉화에 있는 태백산 도솔암에 홀로 들어가 동구불출, 오후불식, 장좌불와를 지키며 6년 동안 수도했다. 이 6년간의 결사를 통해 정법과 대원, 대행을 구족한 스님은 1960년부터 걸림 없는 교화의 길을 펼쳐 보이셨다. 때로는 당대의 선승들과 더불어 선문답을 나누고, 종단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면 종회의원, 교육의원, 법규의원, 감찰위원, 역경위원 등을 맡아 정법의 기틀을 마련하셨다. 30대 때부터 거침없는 교화를 통해 대법사로 이름을 날리고 도처에서 하화중생을 위해 무진 애를 쓰면서도 스님은 한 해도 하안거와 동안거를 거르지 않으셨다.
45세 되던 1973년부터 스님은 인도, 동남아, 유럽 등지의 불교 성지를 돌아보며 우리 불교의 나아갈 바를 궁구하셨고, ‘겉모양이나 언어 문자가 아니라 마음이야말로 세계 어디서나 통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껴 다시 태백산 도솔암에서 안거정진에 들어가셨다.
1976년 해인총림 율사로 피임된 뒤부터는 율법 관련 서적 출간과 후학 양성을 통하여 일제 이후 무너졌던 이 땅의 율법을 재정립하는 데 더욱 힘을 쏟으셨고, 1980년부터는 미국 고려사 포교를 시작으로 우리 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셨다. 한편, 1987년부터 불치병인 간경화가 찾아오자 오히려 정진으로 일관하며 더 큰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셨다. 병이 어느 정도 다스려지자 스님은 신도들을 위한 불교 관련 책들을 다수 집필하셨으니, 일본에서 간행된 《불안을 희망으로 바꾸어주는 불교의 기도》는 일본의 좋은 책 1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1993년(65세)에는 조계종 전국 구족계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으로 추대되어 모든 승려들에게 부처님의 계를 수계하는 중임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으로 추대되었다.
1996년(68세)부터 연비한 오른손에서 생사리가 나오기 시작한 스님은 말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다음 생에는 지구상의 강국 미국에서 태어나 거룩한 상호를 갖추고 학업을 마치면 한국으로 와서 출가를 하리라. 그래서 젊은 나이에 부처님과 같은 대도를 이루어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이 땅의 불교를 세계에 펼치리라.’ 이후 매년 미국을 찾으시던 스님은 마침내 1999년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열반에 드시니, 법랍은 58년이요 세수는 71세였다. 그밖에 해인사 주지와 은해사 주지 및 조실을 지내셨고, 지족암에 선방을 열어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양성하셨다. 입적 후에도 선과 교와 율에 두루 통달했던 스님, 언제나 자비의 미소를 잃지 않았던 자비 보살로 칭송되고 있다. 얼마 전에 해인사에 사리탑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