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개발계획의 후반기에는 제강설비 확충과 자동차조립공장의 건설도 있었고, 전자공업 분야에서는 라디오, 전화기, 전화교환기 등의 조립공업이 나타났다. 기계공업에서는 모터, 변압기계 및 농업용 기계공업이 영세하나마 출현하여 중공업 분야도 태동하기 시작했다.
에너지원의 개발과 확충 노력은 전력과 석탄 생산에 집중 투입되었다. 전원개발계획은 1961년 6월 전력 3사를 통합하는 ‘한국전력주식회사법’을 제정하고 전력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1961년에 367천KW였던 발전량이 1964년에는 약 2배인 679천KW로 증대하여 해방 후 처음으로 무제한 송전을 실시했다. 사회간접시설은 공업화 추진과 병행하여 주로 철도 노선 확충에 두어 수송의 원활화를 도모했고, 공업단지 건설을 위한 지원 시설에 집중투자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 공업화의 주류는 경공업 발전이었으며 경공업 중에서도 섬유공업이 양적 확장과 더불어 품질이 개선되어 당시 공산품 수출에서 약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 p.67
제1차 및 제2차 개발계획의 성공은 고용문제 해결, 외화 절약 및 가득(稼得), 산업구조의 고도화 등 여러 측면에서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점점 어려워지는 대내외 난관을 극복하고 이 이상으로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중화학공업의 추진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1980년대 경제 미래상으로 제시된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GNP 1,000달러라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중화학공업화정책을 수반해야만 했다.
--- pp.102-103
중화학공업화정책은 제3차 개발계획 기간의 2차 연도인 1973년부터 제4차 개발계획 기간의 3차 연도인 1979년까지 7년간에 걸쳐 실시되었다.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GNP 1,000달러는 1981년도의 미래상으로 제시되었으며 중화학공업화정책도 1981년까지 완료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그러나 계획한 미래상과 중화학공업화정책이 목표한 바를 모두 3~4년 앞당겨 달성했다. 수출은 1977년에 100억 달러 고지를 점령했고, 1인당 GNP는 1978년에 1,330달러가 되었으니 중화학공업화 목표를 1979년에 조기 달성하게 된 것이다. --- p.117
중화학공업화정책 중 철강공업에 가장 많은 투자가 필요했으며 가장 뚜렷한 효과를 거두었고 시간적으로도 계획대로 완성되었다. 1973년도에 약 100만 톤 생산 규모의 종합제철이 준공된 이래 몇 차례 확장과 생산공정의 합리화를 거쳐 960만 톤 규모의 국제적 공장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 결과 1978년에 양적인 면에서 철강재의 국제환율을 54%로 향상시켰고 생산강종에 있어서도 1972년 59종에서 115종으로 늘려 양적증대와 질적 향상을 모두 이루었다. 이로써 우리나라 철강공업을 세계철강 상위권으로 부상시켰으며 제2제철을 계획대로 진행해 10위권 내의 철강생산선진국 대열에 낄 수 있는 소지를 만들었다. 포항종합제철은 최신기술과 시설을 도입하여 대단위 일관생산체제를 갖춤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철강재를 생산 공급하는 국가가 되었다. 세계철강사에서 가장 단기간에 공장을 건설하고 투자비에서도 철강톤 당 단위 건설비가 세계최저비율, 연주비율, 고로코크스비(高爐, coke ratio), 철강재생산실수율이 세계 이류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후진국 또는 개발도상국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철강공업을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국제비교 우위생산으로까지 발전시키는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 세계 제일의 철강국이라고 하는 일본에서도 위협을 느끼고 ‘부메랑’을 겁내 제2제철 건설 시에는 고로기술 제공을 거절한 것만 보아도 우리나라 철강공업의 국가적 지위를 알 수 있다. --- pp.160-161
과학기술인력 중에 가장 시급한 것이 기능사공급이었기 때문에 공고교육에 의해 기능사를 양성하는 것부터 착수했다. 공고교육개혁의 요지는 공고에서 실기실습을 하지 않고 이론만 가르쳐서 산업현장 수요에 맞지 않는 인력을 배출하는 현실에서 탈피하여 실습을 시켜 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을 양성하자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실기시간을 대폭 늘려 실기위주교육으로 전환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실기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예과 업체보조로 시설을 구비하도록 했으며 실기교사도 특별 양성했다. 공고를 졸업하면 누구든지 기술자격증을 가질 수 있게 했으며 전국, 지역 또는 학교에서 기능경진대회를 개최해서 기능 증진을 도모했다. 특히 기능올림픽 초기에는 주로 공고생이 참가하도록 독려하여 실험 실습에 역점을 두도록 했다.
기능사에 대한 자격증제도의 확립에도 주의를 기울여 기능사자격을 국가기관(기능검정공단)에서 부여하도록 했다. 수요와 공급을 조화시키기 위해 업체에서도 자격증을 보유한 공고졸업생 우선 채용하도록 했다. 또한 사회에서 푸대접받고 있는 기술인을 후대하도록 각종 실기대회 입상자에 대한 특별대우제도를 마련하기도 했다. --- p.225
정부가 출원하는 공공연구소활동이 활발지는 동시에 민간 에서 자체적으로 R&D 활동을 해야 할 즈음 산업발전의 주체 인 일반기업체가 연구소를 설립하도록 독려했으며 이의 협의 체로서 민간기술연구소협회(현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가 설립됐다. 이렇게 하여 설립된 연구소의 연구개발계획의 기본시책은 첫째, 국가연구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시키는 것과 둘째, 산업 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보급하는 것 두 가지였다.
국가연구는 장기간에 걸쳐 연구개발이 필요한 국책적 연구 과제를 선정하여 이를 계획적으로 추진하고 국가연구체제를 정비하여 효율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목표였고, 산업연구는 산 업에 필요한 선진기술을 빠르게 도입하여 토착화해 나가면서 신기술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전개했다. 국가연구사업은 정부 기관이나 연구소에서 연구과제를 정해 과학심의의회를 거쳐 확정 수행하도록 하고 산업연구는 중점전략산업분야 205개 업체를 정하고 연구개발을 의무화하여 연구소를 설립하고 기 업 자체가 기술개발촉구책을 강구하도록 했다.
--- p.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