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은 처음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감추지 않았었다. 낯설고 위험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자극적인, 그녀와는 다른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숨김없이 뿜어냈었다. 게다가 그가 사랑하는 방식은 우경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고, 그러면서도 놀랄 만큼 순진하고 직선적이며 저돌적이고, 가슴 뭉클한 다정함으로 다가오다가도 순간적인 감정의 폭발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지고 난폭하게 타올라서 그녀를 삼켜버릴 듯이 압도하고.
지금 눈앞에 잠들어 있는 이 남자의 모습을 한마디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서서히 그녀의 마음속에 스며들었고, 그녀를 물들였다.
은재의 손가락이 서현의 입술에 머물다 목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왔다. 질투심에 못 이겨 깨물었던 어깨엔 이빨 자국이 선명했는데, 심하진 않았지만 검붉게 피가 맺혀 있었다. 은재는 서현의 가슴에 뺨을 대고 심장이 뛰는 소리를 느꼈다. 규칙적이고 힘찬 움직임에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은재는 몸을 굽힌 채 조금 더 서현을 만졌다. 그에게선 전사의 냄새가 났다. 아마도 먼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누구보다 사납고 용감하게 전쟁터를 누볐을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아내를 안아주고, 그 아내를 위해 정성들여 옷을 지어줄 남자였다.
이 남자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길이 영광의 길이건, 또는 고난과 눈물로 이어진 가시밭길이건, 그가 이끄는 대로, 그의 커다란 손에 의지해서라면 단 한마디 불평도 없이 뒤를 따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길을 트며 앞서 가느라 지친 그에게 따뜻한 위로를 아낌없이 부어주고, 피 흘린 그를 위해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매일 밤 뜨거운 사랑을 나누며 그와 나란히 고단한 하루를 마감할 수만 있다면…….
“일어났어? 열은 이제 다 내린 거야?”
어느새 잠이 깬 서현이 왼팔로 은재의 머리를 안으며 물었다.
“아주 좋아. 너는? 너도 잘 잤어? 내가 깨운 거야?”
은재가 얼굴을 들려 하자 서현은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좀 더 오래 자신의 가슴에 뺨을 대고 있게 했다.
“아니, 나도 잘 잤어. 모처럼 푹 잔 것 같아. 위험한 날만 아니면 지금 이대로 널 다시 안고 싶은데, 이번에 안으면 참는 건 무리인 것 같다. 그러니 일어나야겠지?”
그러면서도 서현은 몸을 일으키는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만 쓰다듬었다. 은재는 빙그레 웃으며 서현의 심장에 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 있잖아, 지금 너의 아내가 되고 싶단 생각을 했어. 너의 여자가 아니라 너의 아내. 그래서 널 닮은 아이들도 많이 낳고 서로 아끼고 위해주면서, 우리 엄마랑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 쓰러지지 않게 받쳐주고 나란히 걸어가는 거야. 눈물이 흐를 땐 서로 닦아주고……, 그러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 그럼 정말 멋질 거야. 그치?”
“응, 멋지겠다. 그렇게 되면. 그치만 나 닮은 녀석은 사양이야. 골칫거리가 두 배로 늘 테니까. 너 닮은 딸 셋에, 나 닮은 아들 하나. 우리 그렇게 낳자. 좋지?”
은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서현도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그녀의 팔을 들어 손등과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고 입술과 이마에도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아무리 말해도 모자라지만……. 알지? 난 너 아니면 안 된다는 거. 너한텐 턱없이 부족한 남자지만 너라면 날 쓸모 있는 남자로 만들어줄 거야. 그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