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 경성보통학교와 중동중학교를 마친 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영문과에 진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함북 나남의 북조선일일보(北鮮日日報),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1924년 『금성』 3호에 「적성(赤星)을 손가락질 하며」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서 「북청물장수」, 「옛날의 터전」등을 발표하고, 1925년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을 발표하면서 당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어서 같은 해에 또 다른 장편서사시집인 「승천하는 청춘」을 발간해서 서사시적 전통이 미약한 우리 근대시문학에 호흡이 긴 서사시의 바탕을 마련했다. 1925년 8월 조선프로예맹 설립에 가담했고, 1926년 12월 조선프로예맹 임시 총회에도 참가했다. 1927년 2월 사회주의 연극운동 단체 불개미 극단의 창립 위원이 되었고, 5월 중앙청년회관에서 문예시대사 주최 강연회에 김기진, 최서해 이익상 등과 함께 참가했다. 1928년 4월 카프 개성 지부에서 애국문학을 주창한 김동환의 비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비판하고 그 징계를 요구함으로써 조선프로예맹으로부터 제명되었다. 1929년에는 이광수(李光洙), 주요한(朱耀翰)과 함께 합동시집인 「시가집」을 냈고, 1942년에는 시집 「해당화」를 펴냈다. 한편 1929년 종합월간지『삼천리』와 문학잡지 『삼천리문학』을 창간해서 운영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에는 친일 경력이 문제가 되어 이광수, 최남선(崔南善) 등과 함께 반민법에 회부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출처 : wikid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