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출생의 소설가, 희곡 작가로 재일 한인 문학의 효시로 여겨지는 작가이다. 김사량은 191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30년 평양교보 시절 반일 저항시위로 동맹휴교에 참여한 주동자로 찍혀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36년 동경제국대학 독문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와 파시즘의 흐름에 맞선다는 뜻의 동인지 『제방』에서 활동했다. 1939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시작하고 같은 해 4월 그의 출세작 「빛 속으로」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일본인 아버지와 조선인 어머니를 둔 혼혈아의 심리를 관찰한 소설로서 일본의 아쿠타가와 상 수상 후보에 올라 사토 하루오로부터 ‘민족의 비통을 섬세히 그려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토성랑」, 「천마」, 「풀은 우거지다」 등을 발표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경찰에 구금되었던 그는 1945년 2월 조선 출신 학도병 위문단의 일원으로 시인 노천명과 함께 중국에 파견된 길에 탈출을 감행하였다. 그해 5월 말 항일조선인부대가 활동 중인 중국 북동부의 태항산 근거지에 도착한다. 거기서 그는 조선독립의용군에 참가하려다 해방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1945년 10월 평양으로 들어가 북한의 인민 예술가로서 문학 창작을 하고 지도적인 입장에 섰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일본어로 소설을 썼고 그것이 일본의 대표적인 잡지 『문예춘추』나 『문예』에 게재되었다는 것은 결코 그의 경력을 빛내 주지 못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종군기자가 된 그는 북한의 인민군 진군을 따라 서울-수원-대전을 거쳐 마산까지 내려갔다. 그는 종군기로 「서울에서 수원으로」, 「우리는 이렇게 이겼다」, 「지리산을 지나며」, 「락동강 호반을 지나며」 등을 발표했다. 하지만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갑자기 전황이 불리해지자 패주하게 되면서, 김사량은 지병인 심장병 때문에 결국 원주 근처 산중에서 퇴각 진열로부터 낙오되었다. 전우에게 아껴 쓰던 만년필을 유물로 주며 그것을 가족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한 후, 1950년 9월 17일 그가 남긴 종군기 「바다가 보인다」를 마지막으로 이후 그는 영원히 행방불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