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김정식. 「엄마야 누나야」, 「금잔디」 등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한 21살 때부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22년 한 해에만 41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의욕적인 활동을 하였다. 당시 문단은 섬세한 감정을 민요조로 노래한 그의 시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십대 초반부터 문단의 별이 된 그는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간 후에도 꾸준히 시를 발표했다. 유학은 관동대지진 때문에 곧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때 자신과 민족이 처한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을 계기로 시 세계에 변화가 생겼다. 초기에는 민요조의 여성적이고 서정적인 목소리의 시작활동을 하였으나 후기작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등에서는 민족적 현실의 각성을 통해 남성적이며 참여적인 목소리로 바뀌었다. 시집 진달래꽃(1925)은 발표 당시 문단과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로 인해 실의에 빠진 그는 낙향하여 술에 젖은 불안정한 세월을 보낸다. 십여 년 뒤 오랜 공백을 깨고 다시 시를 발표했지만, 같은 해 겨울 끝내 아편 자살로 서른셋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김소월은 불과 5, 6년 남짓한 짧은 문단생활 동안 154 편의 시와 시론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한과 정서를 담아낸 시를 쓴 소월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