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희권(熙權), 호 안서(岸曙) 경기도 고삼(古三, 현 경기도 안성)에서 안직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들은 월북 작가 안회남(安懷南)이고, 친일정객이었던 안경수가 백부였다. 훗날 안국선은 안경수의 양자로 들어가서, 생부보다 그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안국선이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서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보통과에 입학한 것도 안경수의 절대적인 도움 덕분이었다고 한다. 서구문예를 조선에 소개하고 창작에 전념하여 한국 자유시가 형태를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오산학교 교사로 있을 때 김소월과 사제의 연을 맺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영어, 일어, 한문에 능통했고 에스페란토어도 하였다. 그의 뛰어난 언어 능력은 한국 최초의 근대 변역시집 『오뇌의 무도』 출간으로 이어졌다. 그 후 『해파리의 노래』, 『안서 시집』 등 꾸준히 시창작을 하였다. 그의 시는 후기로 갈수록 전통적인 리듬을 지키는 정형시의 성격이 짙어진다. 김억은 친일 시를 발표하고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강사로서 교육계에 몸담았다. 한국전쟁 증 납북되었으며, 정확한 사망 원인이나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