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윤식(金允植). 전라남도 강진에서 대지주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강진보통학교를 다니면서 13세에 결혼하였으나 1년 만에 사별하였다. 졸업 후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 운동 때 학교를 그만두고 강진에서 의거하다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다음해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에서 공부하다가 간토 대지진 때 귀국하였다. 1926년에 두 번째로 결혼하였다. 1930년 정지용,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에 가입하여 동지에 여러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 무렵 쓴 시이다. 1935년 첫째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이후 두어 차례 붓을 꺾기도 하였다. 일제 말기에 창씨와 신사 참배를 거부했고, 광복 후에는 시작 활동에 전념하고 우익 민족 운동에 참가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전투 중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유탄에 맞아 48세로 사망하였다. 영랑은 우리 민족의 정한을 노래한 시인으로 시 세계는 동양적 은일의 시관과 한시, 특히 고산 윤선도의 시조 등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자연에 자신의 감정을 맑게 투영한 탁월한 서정시를 썼다. 김영랑은 ‘북에 소월, 남에 영랑’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말을 다루는 언어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는 『영랑시집』과 1949년 자선(自選)으로 중앙문화사에서 간행된 『영랑시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