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에서 나기정과 최시의의 5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1910년 수원 삼일여학교에 입학하고, 9월에 진명여학교에 편입하였다. 1913년에 진명여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여,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1913년에 먼저 일본에 유학한 오빠의 주선으로, 도쿄사립 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하여 유화를 공부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여자유학생 학우회 기관지인 『여자계』 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 맞서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하는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1918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다가, 건강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유학 시절 약혼자였던 시인 최승구가 죽은 후, 1917년부터 알게 된 김우영과 1920년에 결혼하였다. 나혜석이 김우영에게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란 조건을 내걸고, 1920년 결혼식 청첩을 신문에 연일 광고하여 화제가 되었다. 안동에서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화가로서 한계를 느끼고 1927년에 유럽과 미국 시찰을 가게 된 김우영을 따라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최린과의 염문을 이유로 김우영과 1930년 이혼하였다. 이후 나혜석은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여자미술학사를 차리는 등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꿈꾸었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오빠의 경제적 지원이 끊기고, 사회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들으면서, 아이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으로 심신이 병들어갔다. 1940년의 창씨개명령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으며 방랑생활을 하였다. 1944년 경성 인왕산의 청운 양로원에 들어갔으나 1945년에 파킨슨병이 악화되면서 정신이상이 심하다는 이유로 퇴소하고 보육원과 병원, 산사를 오가다가 1948년 서울의 시립 자제원 병동에 무연고자로 입원하였다. 1948년 나혜석이 병동에서 세상을 떠나고, 1949년 무연고자 시신 공고가 실리고서야 신원이 밝혀져, 나혜석의 죽음이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