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4월 26일 서울에서 출생. 아명은 창흥, 자는 공육, 호는 육당, 한샘 등을 사용했다. 1901년 황성신문 등에 논설을 투고하기 시작, 대한홍국책을 투고하였으나 몰서됨. 1904년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 부립 제일중학에 입학했으나 2개월 만에 귀국했다. 1906년 제2차 동경 유학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여 대한유학생회보를 편집하는 등 활동하다가, 1907년 학교에서 경술국치를 의제로 내건 모의국회사건으로 격분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신문관을 세우고 종합월간지 소년(1908)을 창간하였다. 1909년에는 안창호와 함께 ‘청년학우회’를 설립했다. 1910년 조선광문회를 창립하여 고문헌 보존과 재간행에 힘썼다. 1914년 금강산을 순례하고, 1918년 이듬해 열리는 파리강화회의를 계기로 민족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의논을 주장하였다. 1919년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의 기초 책임자로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이듬해 출옥했다. 1922년 동명사를 세우고 잡지 동명을 발간하는 등 민족문화와 문화유산을 발굴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1927년 총독부 조선사 편수위원회의 촉탁으로 위촉되었고, 1938년에는 만주 신경으로 건너가 친일 한국어 신문인 만몽일보의 고문을 지냈다. 1955년 육군대학에서 국사 강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57년 68세로 사망했다. 저서로는 『심춘순례』, 『단군론』, 『불함문화론』, 『백팔번뇌』, 『시조유취』, 『아시조선』, 『백두산 근참기』, 『조선불교』, 『고사통』, 『조선독립운동사』, 『국민조선역사』, 『쉽고 빠른 조선역사』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