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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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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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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2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412쪽 | 744g | 153*224*30mm
ISBN13 9788991799400
ISBN10 899179940X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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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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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직역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사실은 존중합니다. 하지만 제가 존중하는 직역주의는 어떤 절실함이 바탕에 깔린 마음입니다. 가령 중국의 루쉰 같은 작가가 보였던 모습입니다. 루쉰은 중국이 열강에 먹힌 것은 봉건 전통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전통과 결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루한 습속에 물든 중국어도 뜯어고쳐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직역이라는 어려운 길을 골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루쉰도 번지르르한 새 어휘를 나열하면서 허세를 부리는 당대 지식인들은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저는 한국의 직역주의에서는 루쉰의 절실함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과 미국에게 식민지 대접을 받았고 그때마다 그들에 대한 깊은 열등감에 젖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전통을 살리기보다는 앞섰다고 생각하는 나라를 모방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한국어는 이미 중국어와 일본어와 영어의 영향을 지나치리만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남아 있는 한국어의 개성을 지키는 쪽, 다시 말해서 의역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균형을 잡는 의미에서도 옳다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 pp.33~34 「1장 들이밀까, 길들일까」 중에서

extremely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아주’이지만 두 말의 외연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부사가 그런 점이 두드러지는데, 저는 한국어는 표현이 아주 풍부하기 때문에 개별 어휘의 외연은 좁으며, 따라서 외연이 넓은 영어 어휘를 외연이 좁은 한국어 어휘로 잘게 쪼개어 나타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직역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 전치사도 구체적으로 나타내주면 좋습니다. 가령 “The two parties fought the last election on almost identical manifestos.” 같은 영문은 “지난 선거에서 두 당은 엇비슷한 공약으로 겨루었다.”보다는 “지난 선거에서 두 당은 엇비슷한 공약을 내걸고 겨루었다.”라고 옮기는 것이 훨씬 명확합니다. 영어 전치사는 명사와 명사를 접착제처럼 이어주는 역할을 하지만 사실은 동사에 가까운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그 동사의 뜻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면 좋습니다. 가령 the agreement between the two countries도 ‘두 나라 사이의 합의’라고만 옮길 것이 아니라 때로는 ‘두 나라 사이에서 이루어진 합의’라고 옮길 필요가 있습니다. 어려운 책일수록 이런 주변적 표현만이라도 구체적이고 쉽게 써주어야 합니다.
--- pp.216~217 「12장 좁히기」 중에서

한국어보다 영어에서 명사의 활동 반경이 훨씬 더 넓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입니다. 프랑스어에서는 명사의 활동 반경이 영어보다 더 넓습니다. 프랑스어는 영어보다 명사를 더 많이 써서 정적이고 추상적인 느낌을 줍니다. 반면에 영어는 동적이고 구체적인 느낌을 줍니다. 프랑스어는 무엇보다도 형식, 확정된 상태, 분석을 통해 현실에서 잘라낸 조각들을 나타내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프랑스어는 또 사건을 실체로 제시하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는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처럼 명사를 동사나 부사, 형용사 같은 다른 품사로 바꾸어줘야 할 때가 많습니다. 가령 프랑스어 “J’ai faim.”은 영어로는 “I have a hunger.”가 아니라 “I am hungry.”가 제격이고 “J’ai froid.”는 “ have a coldness.”가 아니라 “I am cold.”가 어울립니다. 또 “Je n’etais pas la a leur arrive.”는 “I wasn’t there at his arrival.”이 아니라 “I wasn’t there when they arrived.”라고 옮기는 쪽이 영어답습니다.
--- p.39 「2장 한국어의 개성」 중에서

한국어에서 부사는 영어에서보다 섬세하게 쓰입니다. 그것은 부사의 종류가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령 “A dog suddenly attacked me.”라는 영문을 한국어로는 “개가 나한테 갑자기 덤벼들었다.” 정도로 옮길 수 있겠지요. 무난한 번역입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번역이기도 합니다. 한국어가 지닌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뜻은 같더라도 누구한테 갑자기 덤벼드는 상황을 묘사할 때는 ‘홱 덤벼들었다’라고 하면 더 실감이 나지 않을까요. 또 “Dark flames suddenly rose up.” 같은 문장은 “검은 연기가 갑자기 치솟았다.”도 괜찮겠지만 “검은 연기가 확 치솟았다.”라고 하면 연기가 꾸역꾸역 치솟는 모습이 정말 눈에 선하게 그려지겠지요. 마찬가지로 “A policeman suddenly appeared.”는 “경찰이 갑자기 나타났다.”보다 “경찰이 불쑥 나타났다.”라고 옮기면 읽는 사람은 가슴이 더 콩닥콩닥 뛰지 않겠삽니까.
--- pp.116~117 「7장 죽은 문장 살려내는 부사」 중에서

토박이말을 쓰는 까닭은 민족주의를 주장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머리에 잘 들어온다는 소박한 이유에서입니다. 가령 영국 성공회에는 High Church, Low Church, Broad Church 같은 다양한 종파가 있었습니다. High Church는 권위와 전례를 중시하는 가톨릭에 가까운 입장이고 Low Church는 의식보다는 복음을 중시하는 입장, Broad Church는 포용성을 중시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 세 단어를 보통 영한사전에서는 각각 ‘고교회파’, ‘저교회파’, ‘광교회파’로 풀이합니다. 이것을 ‘높은 교회파’, ‘낮은 교회파’, ‘넓은 교회파’라고 해주면 훨씬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을까요? 특히 ‘광교회파’라고 하면 아마 독자들 대부분은 ‘넓을 광’을 떠올리기보다는 ‘빛 광’을 떠올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한글로만 쓴다고 해서 언문일치가 아닙니다. 정말 언문일치체는 말하듯이 쉽게 쓰는 글을 말합니다. 말하듯이 쉽게 쓴 글은 꼭 눈으로 읽지 않고 귀로 듣기만 해도 알아들을 수 있는 글입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듣기만 해도 알아들으려면 토박이말을 많이 써주어야 합니다.
--- p.290 「16장 느낌이 사는 토박이말」 중에서

고유 명사는 말 그대로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고유 명사 중에는 번역어는 없고 원어만 있는 단어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번역어와 원어의 문화적 거리가 멀 때 원어를 그대로 드러내면 독자는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번역자가 설명을 덧붙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설명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석을 달아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본문 안에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학술서인 경우나 학술서가 아닌 경우라도 그 말이 굉장히 중요한 뜻을 지닐 경우에는 주석을 달아주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학술서도 아니고 그 말이 핵심적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경우에 주를 너무 많이 달아주면 독자가 책에 집중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때는 본문에다 풀어서 설명해주면 좋지 않을까요. 다음은 소설의 한 대목입니다.

“Let’s talk about Bonfire Night.” Jacob relaxed now that the conversation was within his range. The fifth of November was one of the landmarks of Jacob’s year. He started looking forward to it months in advance.
“밤에 폭죽 터뜨리는 얘기나 하자.” 제이콥은 이제 자기가 끼어들 수 있는 대화를 하니까 마음이 풀어졌다. 가이 폭스라는 가톨릭교도가 잉글랜드 국왕을 시해하려던 음모를 사전에 적발한 것을 기념하여 해마다 11월 5일 밤에 터뜨리는 폭죽 놀이는 제이콥한테는 한 해의 가장 중요한 사건에 들어갔다. 몇 달 전부터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이 폭스 데이’를 알지만 한국인은 그날이 무슨 날인지 모릅니다. 더구나 원문에는 ‘가이 폭스’라는 이름도 안 나오고 그저 폭죽을 터뜨리는 날이라고만 나옵니다. 그래서 “가이 폭스라는 가톨릭교도가 잉글랜드 국왕을 죽이려던 음모를 미리 적발한 것을 기념하여 해마다 11월 5일 밤에 터뜨리는 폭죽 놀이”라고 원문에 없는 내용을 덧붙여서 번역했습니다. 가이 폭스는 실존 인물이지만, 허구의 세계에서도 가령 작품명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고유 명사가 적지 않습니다.
--- pp.225~226 「13장 덧붙이기」 중에서

사전에 나온 풀이어는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전도 살아 있는 표현의 아주 일부만을 담아낼 뿐입니다. 사전은 말의 지도입니다. 지도가 살아 있는 땅을 추상화하여 나타내듯이 사전도 살아 있는 말을 체로 걸러 뼈만 추려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뛰어난 지도는 땅 자체이듯이 가장 뛰어난 사전은 사람 머릿속에 날것으로 들어 있는 낱말들입니다. 번역자는 자기 머리에 들어 있는 그 팔팔한 말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프랑스의 번역가 발레리 라르보도 번역자는 사전이 보여주는 등가어가 아니라 '우리 기억의 사전'에 있는 말을 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억의 사전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책, 좋은 문장을 평소에 많이 읽고 머릿속에 담아 두어야 알찬 기억의 사전이 만들어집니다. ……
기억을 아무리 뒤져도 안 나오는 말은 천상 새로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땅한 표현이 없을 때는 적극적으로 말을 만들어낼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영한사전은 그런 점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스스로 말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영일사전에서 먼저 말을 만들면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때가 많았습니다. 한국은 60여 년 전에 일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조어를 놓고 보면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에 가깝습니다. 종주국에서 먼저 말을 내놓지 않으면 스스로 만들 줄을 모릅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스스로 말을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 p.363 「18장 말의 지도, 사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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