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은 서울 · 평양 · 성천 · 해주 · 강계 · 함흥 · 진주 · 전주 · 경주 등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이 지역에서 이러한 역할을 이어갔다.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릿집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었다. 비로소 일반인도 요릿집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된 기생은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쳤으며, 이들 권번 기생은 다른 기녀들과는 엄격히 구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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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권번의 기능면에서는 전통예능 교육의 산실이었다. 하규일이 운영하던 조선권번에서는 성악으로 여창가곡, 가사, 시조, 남도소리, 서도소리, 경기십이잡가, 잡가 등과 악기로는 가야금, 거문고, 양금, 장구 등을 가르쳤다. 또 춤은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을 망라했고 그 밖에 서양댄스, 서화를 가르쳤다. 기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능종목은 물론 일반교양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내용으로 짜여 있었다. 이렇게 권번은 전통예능의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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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은 오늘날 연예인의 선조다. 재주와 끼도 많고 스캔들도 만들고, 대중 인기의 수명을 가졌다. 항상 안정된 삶을 위해 은퇴를 생각하고 멀티플레이어의 전형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 한다. 레코드 가수로 성공하면 영화에 진출하고 경성라디오방송에 출연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그러면서도 사생활을 밝히기 싫어하며, 예뻐지기 위해 뭐든 하였다. 그 당시 잡지와 신문의 연예란은 그들을 봉건적인 타파의 대상이 아니라 근대의 대중스타로 대우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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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에서 유일하게 여성 문학과 전통 예술을 계승하였던 ‘기생’은 매력적인 문화콘텐츠의 대상이다. 더구나 문화콘텐츠의 스토리텔링 분야에서 탁월한 제재와 소재가 될뿐더러 대외 경쟁력도 뛰어나다. 머지않아 우리나라 문화의 콘텐츠에서 비교우위로 내세울 수 있는 ‘국가대표’ 브랜드 중에 하나가 바로 기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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