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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못 된 세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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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못 된 세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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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2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264쪽 | 478g | 150*220*20mm
ISBN13 9788934933526
ISBN10 8934933526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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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면서
들어가기 전에 _권력의 그늘은 깊다

1. 바람에 진 꽃봉오리 _최초의 세자 이방석
2. 나는 전설이다 _양녕대군 이제
3.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_소현세자 이왕
4. 잠수함의 토끼 _사도세자 이선
5. 춘궁 뒤뜰 봄볕이 다하기도 전에 _의경세자 이장, 순회세자 이부,
효장세자 이행, 문효세자 이향, 효명세자 이영
6. 아버지와 함께 폐위되다 _폐세자 이질, 이황
7.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_영친왕 이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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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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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왕과 그 후계자인 세자만큼 공인의 삶이 철저하게 강요된 사람은 또 없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일거수일투족을 엄중히 감시받았으며, 매사에 정해진 기준과 절차에 맞게 행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것은 왕조국가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하기도 했다. 전제권력을 손에 쥔 왕이 자칫 관행에서 이탈하면 잔혹한 압제자로 바뀔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공인 역시 사적으로는 평범한 인간인 이상, 그것은 불편한, 그리고 잔인한 일이었다. 공과 사를 아직 구별도 못할 나이에, 한창 청춘의 열기가 끓어오르는 시기에 일체의 사를 없애고 오직 공으로만 살아가라는 것,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대체로 조선의 세자들은 불행했고, 우울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숫자가 끝내 왕좌에 앉아보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행동을 분석할 때는 그의 공적인 맥락과 사적인 맥락을 모두 살펴야 한다. 즉 정치학적인 접근법과 심리학적인 접근법이 모두 필요하다. 어느 한쪽에 치우칠 때, 우리는 역사를 편협하게 이해하게 된다. 가령 왜 양녕대군이 쫓겨났는지, 왜 사도세자가 죽어야 했는지를 풀이할 때 지나치게 권력의 맥락에서만 해석해서도, 심리적 접근으로만 이해해서도 안 된다. 이 책은 미흡하나마 두 가지 시각을 모두 사용하여, ‘불행했던 세자들의 역사를 온전히 살피려’ 한 노력의 결과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조선왕조를 통틀어 27명의 세자가 있었다. 절대권력의 2인자, 다음 대의 최고권력자이지만, 그들 중 절반 가까운 12명이 왕이 되지 못한 채 쓸쓸한 최후를 마쳐야 했다. 살해되거나 폐위된 경우가 다섯, 병사한 경우가 여섯, 왕조가 멸망해버린 경우가 하나다. 의안대군, 양녕대군, 소현세자, 사도세자, 영친왕…. 혹은 질병에, 혹은 권력다툼에, 혹은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흐름에 희생된 이 불행했던 남자들의 삶과 죽음을 최초로 조명한다!

세자, 다음 대의 왕! 일견 화려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을 것 같은 세자들이지만, 실제로도 그랬을까? 그렇지 않다! 조선의 세자들은 코흘리개 어린 시절부터 복잡한 예절 교육으로 날을 보내며 만인의 모범이자 공적인 이익을 위해 살도록 강요받았다. 세자의 일상은 책임과 의무로 꽉 차 있었다. 그러면서도 각종 오락이나 취미생활은 철저히 배제된, 마치 수도승이나 고시생 같은 갑갑하고 피로한 삶이었다.

세자는 하루 3번의 유교 경전 공부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한편, 부왕을 보좌하는 역할로 조회에 배석하고 각종 예식과 연회에 참석해 의식을 이끌어야 했으며 경우에 따라 대리청정을 맡아 정무를 돌보기도 했다. 또한 세자의 학문 성취는 왕과 대소신료들의 주요한 관심대상이어서 공부가 조금이라도 미진하다 싶으면 신하들과 유생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이를 시정하시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활쏘기, 말타기 등 무예에 관심을 보여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왕의 아들’이기 전에 ‘권력의 2인자’여야 했던 그들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세자가 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이면서 권력의 2인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종종 필연적인 비극을 불러왔다. 인조는 세자를 노골적으로 경계했고, 태종과 영조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거짓 선언을 거듭하기도 했다. 그만큼 세자의 존재는 현 왕에게 정치적인 위협이었던 것이다. 왕이 늙고 병에 걸려 신하들이 ‘떠오르는 태양’인 세자 쪽으로 잰걸음을 칠 때, 또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 왕의 권위가 흔들릴 때는 더욱 그랬다.

조선의 세자들은 대체로 불행하고 우울했다. 정치와 권력은 친 혈육 간에도 비정하기만 하고, 책임은 과중했으며 즐거움은 턱없이 부족했다. 아마도 조선의 세자들은 언젠가는 옥좌에 앉아 만인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이상대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그날이 오리라, 그렇게 믿으며 하루하루를 버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절반은 끝내 왕좌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들은 왜, 왕이 되지 못했을까?

▶ 조선왕조 최초의 세자는 살해당했다!
궁궐 댓돌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쓰러진 17세 소년. 그렇게 조선 최초의 세자 의안대군 이방석은 이복형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적장자도 아니고 공로도 없는 어린아이를 세자로 삼는 순간 예견되었던 일이었다. 강력한 재상권이 발휘되는 성리학 국가를 꿈꿨던 정도전과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싶었던 태조의 바람은 결국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으로 끝났다. 이는 왕권과 신권의 대립에서 왕권이 승리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권력도 정치도 몰랐던 소년세자 이방석은 개국 초의 혼란기를 지나던 역사의 희생양인지도 모른다. 또한 일찌감치 후계자를 선정하고 철저한 교육을 통해 성군으로 길러내기 위해 마련된 ‘세자제도’ 역시, 이미 그 출발부터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총명한 동생에게 왕좌를 양보하기 위해 미친 척 했다?
역사에는 그 참모습보다 전설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다. 양녕대군 역시 그렇다. 양녕대군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자질을 가진 동생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일부러 미친 척하며 일탈행동을 일삼아 폐세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후일 세종이라는 걸출한 왕이 된 충녕대군과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였던 세종 시대와 맞물려, 양녕대군의 일화는 조선왕조 최고의 미담으로 그려진다. 정말로 그랬을까? 500년 전의 진실이야 알 수 없지만, 실록에는 충녕대군을 험담하는 양녕의 모습도, 양녕의 비행을 소문내는 충녕의 장인 심온의 모습도 보인다.

양녕대군의 좌절은 더욱 큰 시대적 흐름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태조와 태종을 빼닮아 호탕하고 진취적인 기질의 왕자였다. 그러나 시대는 폭력과 부조리로 점철된 개국 초의 혼란기를 마감하고 평화와 소통의 정치를 펼칠 수성군주를 원하고 있었다. 역사와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 양녕대군은 호방한 북방민족적 가치관과 함께 좌절했던 것이다.

▶ 비정한 아버지와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서
조선왕조 27명의 세자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삶은 산 사람은 누구일까? 8년간의 볼모살이, 천신만고 ?에 고국에 돌아왔지만 냉혹한 아버지의 경계와 의심 속에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사망한 소현세자가 아닐까? 그의 비극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심양에서 볼모살이를 했던 사실, 그 자체에 원인이 있다. 함께 볼모살이를 했으면서도 소현세자처럼 공식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되었던 봉림대군(효종)이 주로 동정과 연민을 얻었던 것과 비교하면 소현세자의 처지는 몇 배나 어려웠다.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를 겨우겨우 줄여놓아도 조선에서는 ‘세자가 심양에서 하는 일이 무어냐’고 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 인조는 유달리 비정하고 경계가 심한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의 손에 독살됐다, 인조가 던진 벼루에 맞아 죽었다는 말까지 있을까? 이런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소현세자의 사후 아내와 세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 영조는 왜 친아들을 죽였는가? 사도세자는 정말로 뒤주에서 죽었을까?
저자는 조선왕조실록, 한중록 및 여러 사료를 조목조목 분석하는 한편, 영조와 사도세자의 내면 심리를 따라가는 방법으로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엽기적인 죽음, ‘뒤주사건’을 새롭게 해독한다. 저자는 영조가 실제로 세자를 죽이려 하지는 않았고, 뒤주에 가둔 것도 잠깐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세자는 동궁의 골방에 유폐되었다가 심리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의 실록에는 뒤주가 등장하지 않는데다 이처럼 처참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치고는 급박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뒤주를 언급하는 유일한 사료인 한중록을 쓴 혜경궁 홍씨는 당시 친정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실제 상황을 지켜보지는 못했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정치적 고려 없이는 한 발짝 떼기도 조심스러운 세자의 자리가 주는 압박감과 그것을 버티지 못하는 기질 때문에 벌어졌다. 그는 유난히 오래 산 임금을 모셨고, 유난히 정치적으로 복잡한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학문에 정진하고 부왕의 짐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유독 심했다. 거기다 영조는 자주 양위 선언을 정치적 카드로 활용했는데, 세자는 석고대죄 등으로 들러리를 서야만 했다. 결국 사도세자는 현대의학에서 볼 때 ‘심리적 공황상태’로 여겨지는 이상행동을 일삼기에 이른다. 세자 스스로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가슴을 짓누르는 우울을 토로하고 있다. “저는 원래 남에게 말 못할 울화 증세가 있는데다, …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사도세자가 절망과 우울 속에서 저지른 비행은 차라리 자해에 가까운 단말마였던 것이다.

▶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최초의 세자가 그랬듯 조선 최후의 세자도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비록 왕의 칭호는 얻었으나, 오늘날 아무도 그를 조선 제28대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11살 어린 나이에 강제로 일본에 보내져 일본 황족과 결혼해야 했고, 나라가 무너지자 이름뿐인 이왕가李王家의 왕이자 일본군 중장의 신분으로 살아야 했던 그. 그래도 그는 일본의 집 안에 작은 종묘를 꾸며놓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혼자서 한국말 연습을 해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광복이 되고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떴다. 그러나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존재를 정권에 위협이 된다고 여겼고, 귀국의 가망은 점점 멀어져갔다. 1963년 영친왕이 겨우 귀국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반신불수에 실어증에 걸린 상태였다. 57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조선의 마지막 세자는 7년간 병원에서 ‘고국생활’을 보내다 조용히 숨을 거뒀다. 조선 왕조의 세자이면서 일본 황실의 일원이었던 그의 모호한 정체성이야말로 이 남자가 겪어야 했던 비극의 결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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