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부터 안개를 뒤집어쓰고 나온 인간이 있습니다. 그를 받는 순간 간호사는 열 손가락을 팔랑대며 비명을 질렀을 겁니다. 하지만 안개소년은 머리에 뿔이 돋거나 이빨이 삐죽삐죽하거나 뱀 혓바닥을 날름대지 않습니다. 악마도 괴물도 아닙니다. 그저 가스등 불빛처럼 뿌연 안개에 가려져 얼굴이 안 보일 따름이죠. --- p.10
회장님은 넋두리나 수다를 혐오하세요. 꼭 필요한 말씀만 하십니다. 인풋과 아웃풋이 확실한 대화만을 선호하세요. 회장님은 인간이란 존재가 말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컴퓨터와 로봇 같은 기계를 좋아하시죠.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쓸모없는 잡념이 없어 시간이 단축되는. 안타깝지만 로봇은 인간만큼 창의적일 수 없잖아요. 그게 로봇의 한계죠. 그래서 회장님은 로봇 같은 인간을 좋아하세요. --- p.72
편의점에 있던 손님들이 다들 놀라 모서리 쪽으로 물러났어. 아이 하나는 아예 엄마의 불룩한 배에 얼굴을 묻고 울먹였어. 관광객인 외국인 노부부가 놀라서 서로에게 영어로 속삭였어. 몇몇 사람이 서둘러 편의점 밖으로 도망쳤어. 편의점 점원은 바코드 리더를 손에 들고 벌벌 떨었는데, 안개강도를 겨누면 레이저 빔이라도 쏠 수 있길 바라는 눈치였지. --- p.103
나는 안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어.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부드럽게 열렸어. 안은 안개에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쓰다듬었어. 서로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아는 사람처럼. 그녀는 내 셔츠 속으로 손을 뻗어 지퍼처럼 생긴 맨살의 흉터를 어루만졌어. 안개소년, 안개소문, 안개로션. 수많은 나의 얼굴들이 그녀와의 포옹 속에 스쳐 갔어. 그녀는 흉터 위로 손을 움직이다 그만 멈칫거렸어. 짧은 시간에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뚝뚝 끊겨 버렸지.
안개가 핀 얼굴로 태어난 ‘안개소년’은 자신을 떠난 부모 대신 외할머니인 ‘로즈마리’와 살게 된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만 외출하던 그는 ‘지나’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소개로 성형외과 원장 남인수를 만나고, 그에게 이끌려 안개다리를 가진 회장과 그의 통역사 ‘안’을 만난다. 그들의 계략에 빠져 원치 않는 수술을 받게 된 안개소년은 길거리에 내버려지고, 인사동 거리에서 캐스팅 매니저인 윤덕호와 그의 후배인 강만호를 만나게 된다. 안개소년은 윤덕호에 의해 TV에 출연하게 되면서 세상에 자신의 얼굴을 알리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