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바다를 보려면 항상 깨어 있거나 아니면 취해 있어야만 돼 그렇지 않으면 어느새 깜박 잠들고 그리고 서서히 죽고 말아
언젠가 많은 꿈을 꾸었어. 이념이라는 것, 혹은 구원과 자유, 힘들어도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아름다운 꿈들을. 그런데 여기 오고부터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냥 안개 같은, 나도 모르게 내 가슴에서 뜨거움과 꿈들을 빨아내는 어떤 거대한 게 눈 앞에 있어. 도대체 그게 뭘까?
극기란 대상이 있을 때만 가능한 거야 유혹이나 시련 따위 구체적일수록 오히려 쉬워질지도 모르지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유배지에서 뿌린 꽃씨들이 죽은 공기를 따라 떠돌다가 지폐와 서류들 위로 목을 꺾는다. 그 씨앗들은 괘종시계가 쉴 새 없이 흔드는 시간 속에서 철사처럼 꼿꼿하게 싹이 트고 자랄 것이다. 믿음이란 그러므로 차라리 남루한 휴식에 가깝다.
이곳은 유배지가 아니다. 여기는 차라리 사냥터이다. 너가 내미는 풍경의 혀를 뽑아놓고 싶다. 너의 물기를 말리고 마른 잎맥의 형상으로 부스러지는 파도를 보고 싶다. 손아귀 안에서 바삭대는 비명. 더러운 입김으로 다가오는 귓속말. 헐떡이는 숨결. 고함. 내딛는 말발굽 소리. 전사들의 함성.
여름날 우연히 한 익사체를 보고 난 후 내게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바다의 기억이 떠오른다. 개발독재 시대에 성장하여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부적응 학생 도철에 대한 교련 선생의 폭력, 그리고 도철과 철환의 죽음을 겪으며 어른이 된 후 무의미한 대학 생활을 보내다 자원입대한다. 겨울철 군에서 나는 소대장 교관의 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한 사람의 비극을 목격한다. 그리고 북파공작선 선장 출신인 강삿갓과 그의 딸인 광녀 심청이를 만나고 오폭사고의 당사자인 사병의 자살을 경험과 심청의 죽음을 목격한다. 어느 날 느닷없이 떨어진 비상 출동 명령에 의해 해안 참호에 투입된 나는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남쪽에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억울하게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죽은 한 친구의 얘기를 듣게 된다. 졸업 후에 사회생활을 하며 최창릭이라는 동물적인 인간을 만난다. 나는 그를 통해 옛날에 사랑했던 개 메리의 죽음과 아버지의 폭력을 떠올린다. 어느 날 나는 술에 취해 갑자기 광기에 사로잡힌다. 그 후 도장감독으로 취업하여 중국인 동료 판떠홍을 만난다. 그리스 선주감독과의 위험한 갈등은 무사히 넘기지만 마지막 작업에서 떠홍은 사고로 죽는다. 모든 일에 회의를 느낀 나는 노르웨이 북단으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