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마루에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경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버지는 담담했다. 텔레비전 리모컨을 집더니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아빠.” 경수가 불렀다. “아빠라고 부르지 마라.”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 이번에는 내가 불렀다. “넌 아빠라고 불러도 된다.” “싫어요.”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텔레비전 앞에 누운 채 졸고 있었다. 부엌에는 라면 끓여 먹은 냄비가 뒹굴고 있었고, 상 위에는 김치 담은 그릇 하나만 달랑 놓여 있었다. 측은지심이 막 몽글몽글 피어오르려는데 잠에서 깬 아버지가 말했다. “애비 밥도 안 주고 어딜 갔다 오는 거냐?” 그 순간 맺히려던 측은지심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하루 종일 고생한 게 누구 때문인데, 하는 생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내게서 나가는 목소리가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밥솥에 밥 있고 냉장고에 반찬 있잖아요.” 그런 다음 재빨리 아버지의 대답을 가로챘다. “손이 없다고요? 오른손은 머리 밑에서 꺼내고 왼손은 리모컨을 놓으세요.”
*아버지와 나는 사포를 하나씩 나눠 들고 벽에 붙었다. 딱딱하게 굳어서 일어난 페인트를 사포로 문지르자 부옇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아버지가 재채기를 했다. 그래도 마스크는 쓰지 않았다. 마스크를 쓰면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다고 했다. 절대 그런 일 없다고 안심시켰지만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엄마랑 살면서 어땠어요?” “뭐가?” 나는 칼을 가져와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긁기 시작했다. 계단을 새카맣게 만든 게 이끼인지 곰팡이인지 알 수 없었다. “행복했냐고 묻는 거예요.” 아버지는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런 거 생각할 겨를이 어딨었냐. 평생 허둥지둥하면서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되잖아요. 행복이란 거 원래 그때는 모른대요. 시간이 지나고 나야 알지.” 아무리 긁어도 변색된 계단을 원래대로 만들 수는 없었다. 오히려 긁을수록 칼자국만 생겨서 더 흉해졌다. 페인트칠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모르겠다. 아니, 나는 괜찮았는데, 네 엄마는…… 고생만 하다 가서…….” 한참 만에야 아버지가 대답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밀짚모자를 씌워 주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목에는 수건을 둘러 주었다.
*그녀는 유자차와 물을 번갈아 마시며 얘기를 이어갔다. 기억나지 않는다면서도 얘기는 끝날 줄을 몰랐고, 세월이 흘렀다면서도 마치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재현해 냈다. 그렇게 호출되어 온 과거가 죄인처럼 무릎 꿇린 채 탁자 위에 쌓이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왜곡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인할 방법도 확인할 마음도 없었다. 엄마의 기운 양말만큼이나 궁상맞은 과거들을 나는 마음으로 쓰다듬고 눈으로 어루만졌다. 국제상사 여자가 엄마의 과거를 불러내면 불러낼수록 내 마음에는 이후 그녀의 부탁에 절대 응하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오기가 쌓여갔다. 아니, 내가 다짐과 오기를 쌓기 위해 그녀를 부추기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국제상사 여자와 작별을 고했다.
은수와 경수 남매는 8년 전 위암으로 죽은 어머니와 각종 의류를 판매하는 ‘국제상사’ 여자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을 아버지에게 듣게 된다. 국제상사 여자 때문에 자신의 아내가 위암으로 죽게 되었다고 단정하면서 그녀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은수와 경수 남매도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아버지의 명으로 국제상사에 취직한 경수는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처음 가졌던 여자에 대한 적개심을 점점 잃게 된다. 동생 경수를 만나기 위해 국제상사에 갔다가 그녀를 만나게 된 은수 역시 그녀의 개인사를 알게 되면서 복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인간적인 고민에 빠지게 된다.
여기 천진스럽다고 하기에는 능청스럽고, 게으르다고 하기에는 행동할 줄 아는, 알고 싶은 것도 많고, 쓸데없는 말 또한 많은 아버지와 딸 그리고 아들이 있다. 파리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은 그들이 어느 날 킬러가 된 까닭은?
구경미의 『키위새 날다』를 읽는 내내, 내 입에서는 키위키위 키위새의 울음소리 같은 웃음이 주책처럼 흘러나왔다. 과연 구경미만큼 가볍고 재밌고 능글스럽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건들건들 딴청 떨듯 그러나 진지하고 성실하게, 구경미가 펼쳐 보이는 유머의 향연…… ‘루저들의, 루저들에 의한, 루저들을 위한’ 유머이기에 값진 게 아닐까. 그래서 웃음 끝에 늘 짠하고 묘한 감동이 남는 게.
누군가가 얄밉다 못해 죽이고 싶도록 미워 우울한 모든 선량하고 소심한 이들에게, 나는 구경미의 『키위새 날다』를 꼭 권하고 싶다. 그 누군가가 자신보다 덜 행복하다는 걸 깨닫고 그만, 미움이 연민으로 바뀌는 마법의 순간을 황홀히 경험할 수도 있으니!
키위새가 특별한 것은, 공룡 같은 현실이 날개를 삼켜 버려 날지 못해도 영혼만은 새처럼 가벼워 훨훨 자유로이 날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주기 때문일 것이다. 김 숨(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