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이수는 요즘 한국의 어떤 소설이 빠져 있는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치장과 과도한 스타일에 홀리지 않고 흡사 삶의 구체를 중계하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 쪽을 택한다. 그의 인물들이 대부분 길 위에 있는 것은 그 때문이고 그 길이 인간을 떠올리게 하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소설의 소재를 확대하기 위한 그의 ‘몸’의 움직임은 건강하고 바르고 심지어 도덕적이기까지 하다. 넓고 먼 것을 뜻한다는 탕탕(蕩蕩)과 높고 큰 모양을 의미한다는 외외(巍巍)의 일면을 그의 소설은 지향한다. 그의 탕탕과 외외가 다만 추상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에 대한 배려를 바탕에 깔고 있으니 믿음직스럽다. 우리가 그를 부러워하며 격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승우 (소설가)
어떤 간절함으로 이토록 머나먼 곳들을 헤매고 다녔을까. 젖은 발과 구겨진 바지자락을 끌며. 미련하고도 발랄하게. 지구 반대편의 먼 도시와 킬리만자로의 그늘과 룸비니의 거리를 지나 해이수가 마침내 도달하고자 한 지점은 어디일까. 아릿한 슬픔과 웃음이 뒤섞이는 글을 다 읽고 나니 알겠다. 왜 ‘룸비니 가는 길’이 아니고「아웃 오브 룸비니」인지를. 해이수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실은 쿰부 히말라야를 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삶을 아프게 감당하는 것이란 사실도. 정미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