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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12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344쪽 | 524g | 150*210*20mm
ISBN13 9788984372757
ISBN10 8984372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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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력감을 느끼며 힘껏 고함을 질렀다. 얼마 안 있어 귀청을 찢어발길 것처럼 굉장한 힘으로 나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고, 곧이어 바닥을 딛고 있던 두 다리의 힘이 모두 빠져 달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41p

“난 아직 당신 이름조차 몰라요.”
“아서 코스텔로입니다. 매사추세츠종합병원 응급의학과에서 일하는 의사죠.”
“나에게 간호사 역할을 제안한 건 허접한 농담이었죠?”
“아뇨,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제안이었습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어서 대답해주세요.”
“영화인가요? 아니면 연극?”
“연극입니다. 그 대신 딱 한 번만 공연하죠.”
“대본은 누가 썼죠?”
“대본을 쓴 사람은 없습니다. 대본 없이 즉흥적으로 연기를 해야 하거든요. 주어지는 상황에 맞춰 임기응변식으로 대처해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장난하는 거예요? 그런 연기라면 사양하겠어요.”
“줄리아드의 과목에 즉흥 연기도 포함되어 있지 않나요?”
리자는 고개를 저었다.
“난 멋진 텍스트가 있는 걸 좋아하죠. 작가의 혼이 담긴 대사를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배우가 즉흥적으로 연기하게 되면 결국 내용이 시시해질 수밖에 없어요.”
“물론 그 지적은 일리가 있습니다만 언제나 그런 건 아니죠.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 가운데서도 즉흥 연기가 빛을 발한 예는 많지 않나요? 가령 [택시 드라이버]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거울을 바라보며 독백하는 장면이나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 가슴 찢어지는 아이스크림 장면 같은 경우 즉흥 연기가 영화를 더욱 빛나게 했잖아요. 더스틴 호프만이 아들에게 ‘빌리, 만일 네가 그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면……’이라고 경고하는 장면 말입니다.”
“‘……너에게 아주 힘든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라고 했죠.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의 대사를 줄줄이 외우다시피 하지만 그 장면은 즉흥연기가 아니지 않나요?”
--- p.100~101

“난 이상한 일이 거듭되는 동안 조금씩 등대의 저주를 깨닫게 되었어. 정말 기만적이라 할 수 있는 게 뭔지 아니? 누군가가 시간의 미로 속을 헤매는 동안 그 지하공간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폐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거야. 나도 그 이유를 모르니까 왜 그런지 따지지는 마. 호로비츠가 시간의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는 바람에 나는 한동안 아무런 일도 겪지 않고 그 방을 들락거릴 수 있었던 거야.”
“할아버지가 미로 속에서 시간여행을 겪은 24년 동안 아무도 폐해를 입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지금은 네가 시간의 미로 속에 갇힌 주인공이 되었으니 다른 사람에게는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야.”
할아버지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테이블에 대고 톡톡 치며 한 마디 덧붙였다.
“그 빌어먹을 등대가 베푸는 최소한의 관용이랄까?”
--- p.133

사실 나는 심신이 지쳐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나는 등대의 저주에 대해 무방비상태였고, 대항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깊은 절망에 빠뜨렸다. 설리반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가 내가 겪고 있는 몹쓸 일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라 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현재 겪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을 일상의 언어로 설명해주었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비이성적이었지만 나에게는 이의를 제기할 근거가 없었다. 내 머리는 비이성적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절대로 믿어선 안 된다고 속삭이고 있었지만 내 직관은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고려할 때 믿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폈다.
나는 의학을 공부했고,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내린 모든 결정의 근거를 합리성에 두고 있었다. 나는 신을 믿은 적이 없었고, 궤변론자들의 얼토당토한 주장이나 영성 운운하는 감언이설을 철저하게 배격해왔다. 그런 내가 지금 황당한 저주의 포로, 사춘기 시절 텔레비전에서 보던 판타지 드라마들, 가령 [아우터 리미츠(국내에서는 제3의 눈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한 캐나다 드라마 : 옮긴이)], [닥터 후 Doctor Who], [테일스 프롬 더 크립트 Tales from the Crypt], [크립쇼 Creepshow] 등에 나오는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격이었다.
--- p.136~137

갑자기 심술기가 발동한 나는 체스 판을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렸다. 동양 출신 대학생이 체스 판 위에 놓여 있던 지폐 두 장을 재빨리 챙겨 들고 자취를 감추었다.
“네 녀석 때문에 5달러를 잃었잖아.”
할아버지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나를 노려보았다.
“사람이 왔으면 한 번 쳐다보기라도 해야지 계속 체스를 두고 계시니까 공연히 심술이 나잖아요.”
난 할아버지 옆에 슬며시 앉으며 불퉁거렸다.
할아버지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네 놈이 입은 그 파카가 정말 잘 어울려 보여.”
나는 할아버지를 향해 가운데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나도 네 놈을 다시 보게 되어 좋구나.”
할아버지가 염소수염을 긁적이며 말했다.
“새벽 5시에 지하철에서 깨어났는데 건달들에게 걸려 죽도록 얻어터진데다가 몸에 지니고 있던 소지품을 몽땅 털렸어요.”
“기어이 내 시계를 잃어버렸구나.”
--- p.151

“24년 후,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할아버지는 체념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장 기쁘면서도 고약한 일이 일어날 거야.”
생굴이 담긴 접시가 우리 앞에 놓였다. 할아버지는 레몬즙을 생굴에 뿌린 다음 한 개를 집어 들고 입안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기쁜 일은 시간이 정상적으로 흘러간다는 점이지. 시간의 미로 속에서 헤매다가 돌아와 보니 일 년이 훌쩍 지나 있는 경우는 더 이상 없을 테니까. 넌 예전처럼 이 세상에서 네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뜻이야.”
할아버지가 다시 굴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고약한 일은 뭐죠?”
“혹시 등대 지하실 금속판에 새겨져 있던 글귀를 기억하니?”
“라틴어로 된 글귀 말인가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24방위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Postquam viginti quattuor venti flaverint, nihil jam erit).”
할아버지가 나지막하게 글귀를 암송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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