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에 텔레비전에서 해준 CBS 다큐멘터리였던가, 그런 데서 봤거든.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는 사례를 연구하는 미국 법학자가, 수업 전에 아무런 예고 없이 한 남자에게 교실을 지나가게 했어요. 학생들이 다 왔을 때, 남자가 불쑥 교실로 들어와선 말 한마디 없이 칠판 앞을 지나 반대쪽 문으로 나간 겁니다. 그 뒤 교수가 교실로 들어와서 학생들한테 방금 눈앞을 지나간 사람의 특징을 쓰게 시켰다는 실험이죠.”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거 참 뒤죽박죽이더군요. 그쪽은 인종이며 머리 색깔, 눈 색깔이 워낙 다채롭잖습니까. 흑인에 백인, 성별, 나이, 체격까지 용케 이렇게 다양한 답이 나온다 싶을 지경이었어요. 동양인 여자였다는 증언에, 키 큰 흑인 남자였다는 증언까지 있었다 하니 말이죠. 실제론 이십대 백인 남성이었는데도.”
그렇군요. 그거 참 심한데요.
“그렇죠? 그러니 난 내가 본 게 옳다고 믿진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기가 본 걸 이야기할 수밖에 없단 말이죠.” --- p.73
“아니, 우리 모두 이상한 겁니다. 인간의 죽음에 점점 둔감해지죠. 교통사고로 한두 명쯤 죽은들 신문에 나긴 할지. 수천 명, 수백 명 죽지 않는 한 신경도 안 써요. 그런 주제에 언론은 한 사람의 목숨이 지구보다 소중하다느니 뭐니 염치도 없이 그런 소리를 합니다. 언론이 이 사건 때문에 얼마나 기뻐했는지 전 기억합니다. 수수께끼에 싸인 대량의 죽음, 정체불명의 대형 참사. 자신도 말려들 수 있었던 비근한 죽음. 얼마나 스릴 넘칩니까? 다들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더군요. 언론도, 시청자도 다음 참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참사가 일어나면 그쪽으로 몰려가 M에서 죽은 수많은 사람들, 지금도 입원 중인 사람들, 끝없이 이어지는 소송 따위 까맣게 잊어버릴 테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 pp.134-135
그래. 인간은 말이지, 나쁜 건 자기 탓이라고 하기 싫거든. 기분 나쁜 일, 불쾌한 일은 남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해.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쁜 일이잖아? 하지만 안 죽이면 곤란한 경우라든지 죽이는 게 그 사람한테 유리한 경우가 아주 많단 말이지. 그때 신이 있으면 아주 편리하거든. 신이 명령했다, 신을 위해서, 신의 이름으로,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으니까.
사람을 죽일 때만 그런 게 아냐. 아주 나쁜 일이 있었을 때 남 탓으로 못 돌리면 괴롭잖아? 절대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누구 다른 사람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주 편하지.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보다 남을 미워하는 게 훨씬 편해. 그런 때를 위해 신이 있는 거야. 난 알았어. 사람은 타인을 죽이는 동물이야. 그렇기 때문에 남을 죽이기 쉽게 하려고 신을 만든 거야.
--- pp.302-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