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뉴욕이 아니어도 상관없었을 게다. 피곤에 찌든 서울의 잡지 에디터에게는 디트로이트도 좋은 도시일 테고, 디트로이트의 입국심사원에게는 서울도 괜찮은 도시일 것이다. 우연과 운명의 완벽한 콤비네이션으로 인해 어쨌거나, 나는 뉴욕으로 갔다. 덕분에 몇 가지 중요한 삶의 교훈도 얻었다. 첫 번째는 세상이 꽤 넓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무리 그 사실을 깨달은 척해봐야 세상은 내 생각보다 더 넓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낯선 도시에 혼자 던져졌지만 아무런 바보짓도 하지 않고 우아하게 잘 살았습니다, 라는 식의 여행기는 모조리 뻥이라는 것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이런 곳이라면 실크 가운을 입고 부르고뉴 글래스에 와인을 마셔도 어색하지 않겠고, 붓만 들면 폴 오스터가 빙의 돼 코리안 관광객 버전 《뉴욕 3부작》이 절로 써질 것 같다. 있는 집 자제분들이 도피 유학 와서 묵음직한 이런 럭셔리한 공간에서 5개월간 공주처럼 지낸다 생각하니 서울특별시 최저가 전세방에 살면서 안 먹고, 안 입고, 안 쓴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며 눈물이 찔끔 날 것 같다. 그래, 이건 7년 동안 소처럼 일한 대가로 내게 주는 선물이야. ---p.53 '뉴욕 법정에 서다' 중에서
목소리 톤이 지옥 끝까지 가라앉은 J가 전화기 너머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다. “당신은 프로페셔널하지 않아요.”
미국에서 그건 나가 죽으란 소리나 마찬가지다. 특히 뉴욕처럼 온 세계의 프로들이 모여 경쟁을 하는 곳에서, 클라이언트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일생일대의 치욕이다. 월스트리트에서 수천만 달러짜리 펀드를 운용하는 사람이나 쇼비즈니스계의 거물들뿐 아니라 레스토랑 웨이트리스, 심지어 환경미화원조차 프로페셔널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뉴욕이다. ---p.207 '초특급 할리우드 여배우 인터뷰 작전' 중에서
물론 난 서울을 사랑한다.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다만 미국, 혹은 뉴욕의 단점이라는 것들이 내겐 그리 크게 와 닿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타인들의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여행자가 향수병에 걸리는 데는 대단한 계기나 사건 같은 게 필요 없다. 그저 고향에선 아무런 무리 없이 해치울 수 있는 일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좌절하고 실패감을 맛볼 때,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p.239 '나는 뉴욕의 이방인' 중에서
어느 선배는 뉴욕에서 룸펜 노릇을 하고 있는 나의 블로그에 찾아와 댓글을 남겼다.
‘장기를 팔아서라도 버티고 버텨라.’
누구에겐 꿈이고, 누구에겐 장기를 팔아서라도 머물고 싶은 도시 뉴욕에서 내가 한 일이라곤 고작, 무작정 걷는 것이었다. 스텔라 맥카트니 드레스와 마놀로 블라닉 구두는커녕 다 떨어진 청바지에 플립플랍을 신고 할렘에서 로워 이스트 사이드까지, 리틀 이탈리아에서 센트럴파크 끝까지, 맨해튼의 모든 블록과 블록 사이를 걸었다.
어떤 날은 햇빛 찬란한 공원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스도쿠나 하고 앉아 있는 그런 시간이 너무 좋아서 도저히 서울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