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튼 제 말은요, 그림자를 찾기 위해서는 충분히 아픈 과정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림자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많이 도전하고 부딪치고 아프고 쓰리기도 해봐야죠. 저도 충분히 아픈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이렇게 그림자가 생긴 거구요. 그래서 그림자가 없는 사람들은 용기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상처 받기가 두려워서 과거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었다는 이야기니까요.” --- p.36
“저한테 무영이는 계속 뭘 하려고 하고, 늘 바쁘게 지내는 친구예요. 저도 바빠서 대학 생활 내내 무영이를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친한 친구, 하면 생각나는 친구라 간간히 연락하고 만나고 했거든요. 그런데 정말로 그때마다 늘 뭔가 하고 있었어요. 봉사 활동도 하고 영어 학원도 다니고, 뭐 대외 활동인지 뭔지, 대학생 캠프 같은 것도 여러 번 다니고 그러던데요. 그래서 저는 잘 사는 줄만 알았죠. 그래서 정말 의외였어요. 무영이가 그림자가 없다는 게.” --- pp.49-50
혼자 있는 시간이 마냥 편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고민하고 괴로워할 시간에 남들이 나와는 다른 노력을 더 하고’ 있을까 봐 늘 무영은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쉴 수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눈을 가린 말처럼 앞을 향해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한 번도 마음을 놓고 쉬어본 적이 없는데,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뒤쳐질까 봐 항상 채찍질만 해왔는데, 내 앞에 기다리는 것은 결승선이 아닌,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표지판이었다. 가장 두려워하던 상황이었다. --- p.85
고통이라고 해서 모두 성장의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그것은 영원히 고통으로만 남는다.
살면서 힘든 일을 겪어내고 나면 그림자가 생기고, 제대로 살았다면 누구나 그림자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만연한 시대. 일정 나이가 되었는데도 그림자가 없는 이를 섭외해 일주일간의 생활을 담은 영상을 보며 문제를 분석하고, 호된 독설로 그림자를 만들어주는 TV 프로그램 ‘섀도우 메이커’는 꿈이 없는 청년들에게 꿈을 가져다준다는 계몽적 메시지와 극적인 연출로 동시간대 시청률 1위라는 독보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진행자 구임자는 매번 꿈이 없거나 열심히 살지 않는다며 의뢰인을 다그치고 독설을 퍼부어 그들에게 그림자를 만드는 데 성공해왔지만, 이번 ‘무영’의 경우는 다르다. 어릴 때부터 배우를 꿈으로 삼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온 무영의 하루는 바빴고, 주변 사람의 인터뷰도 무영의 성실성을 입증했다. 아무리 영상을 분석해도 개인적 차원에서 무영에게 독설할 거리를 딱히 찾지 못하자, 구임자는 무영이 평범한 외모와 소심한 성격에 맞지 않는 꿈을 꿨으니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공무원 준비하는 게 어떻겠냐며 사기를 꺾어 결국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무영의 그림자가 극적으로 만들어지는 장면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프로그램은 이후 더욱 승승장구하고, 무영은 충격으로 집에 처박힌다. 시간이 지나도 딸이 방 밖으로 나오지 않자 걱정된 부모는 무영이 모르게 그녀를 공무원학원에 등록하고, 무영은 수업을 연기하러 몇 달 만에 겨우 집밖으로 나갔다가 자신의 그림자가 거대해졌을 뿐 아니라 제멋대로 움직이며 괴상한 소리까지 내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경악한 그녀는 더욱 더 집안에 틀어박히고, 무영의 그림자를 목격한 아파트 경비가 방송국에 제보해 새로운 아이템을 찾던 ‘섀도우 메이커’ 제작진은 다시 출연해달라고 무영을 끈질기게 설득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