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소설이었을까. 내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우리말을 부리는 데 집착에 가까운 강박이 있다고 해도, 소설을 쓰려는 욕심은 다른 층위의 문제다. 인욱과 지호를 만나기 전에는 ‘내가’, ‘소설을’ 쓴다는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요즘에는 인터넷에서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지만, 아무래도 나는 소설가나 시인을 팔이 세 개 달린 다른 종족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인욱과 지호가 연극을 하거나 그림을 그렸더라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끌려갔을까. 나는 잠깐 눈을 감은 채 연극을 하기에는 부적합한 나의 발성과, 그림을 그리기에는 부족한 나의 센스를 가늠해보았다. 그렇다고 소설을 쓰는 데 맞춤하는가 하면 결국 그것도 아니다. 잠깐 우울해졌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이 어느 날 소나기처럼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금방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어 푸르게 잎을 피웠고 바람이 불 때마다 서걱거렸다.
성적에 맞추어 적당히 한 대학의 불문과에 진학한 ‘나’는 낯선 언어와 맞닥뜨리면서 번번이 소통에 실패한다. 관계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언젠가는 나라는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던 중, 소설 창작 스터디 그룹인 ‘승강이’를 알게 된다. 스터디 멤버들은 모두 비정상적인 데가 있거나 독특한 면이 있다. 아버지가 세 명인데다 바이섹슈얼인 ‘지호’, 군대를 면제받았다는 이유로 남자들 사이에서 모욕을 당하는 ‘인욱’, 미국인 교환학생이자 혼혈아인 ‘강’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겉으로는 직접 쓴 소설을 출판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있지만 이들 모두에게 소설 스터디의 목적은 그저 함께 쓰는 것이다. 집안의 폭력적인 반대를 뚫고 영화 공부를 하러 인도로 달아났다 귀국한 나의 ‘고모’는 정식 영화 교육도 받지 못했고 수상 실적 같은 것도 없지만 영화에 대한 지치지 않는 열정을 품고 있다. ‘나’는 고모를 통해 ‘번듯한 결과로 드러나지 않아도 괜찮은’ 삶의 가치를 긍정하게 된다. 그 무렵 ‘강’이 스터디 모임에 찾아온다. 그는 백인혼혈이기 때문에 언뜻 인종 권력에서 우위를 점한 듯 보이지만, 사실 미혼모의 자식이며 미국인 여성과 아시아 남성의 혼혈이라는 점에서 성별/인종 권력의 촘촘한 경계에 서 있다. ‘강’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부모의 이야기를 한국어 소설 속에서 복원하여 스스로 그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다. 이렇게 스터디 멤버들은 서로 부대끼며 그들만의 소설을 써나간다. 그러던 중 지하철에서 벌어진 소동으로 인터넷에서 마녀사냥을 당한 ‘나’는 그동안 믿어왔던 언어가 진실에 다가서기는커녕 왜곡되고 오염되는 상황을 겪으며 절망하지만, 소설 쓰기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나의 진실된 모습을 믿어주는 스터디 멤버들의 신뢰와 결속력이다. 시간이 지나 ‘강’이 사실은 교환학생이 아니라 불법 체류자임이 탄로나 강제 추방까지 당하게 되자 ‘강’에 대한 억측과 유언비어가 난무하지만 스터디 멤버들은 그에 대해 침묵한다. 이후 미국에서 ‘강’의 소설이 도착한다. 이국의 언어로 혼자서 사투를 벌이며 썼던 그 소설에는 ‘강’이 했던 모든 말들이 거짓이었지만 그가 소설을 쓰려고 했던 열망만은 진실이었음을 증명하는 힘이 들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소설을 보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쓰자고 결심하며 첫 소설 ‘승강이’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