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남은 자신의 발을 떠받치고 있는 콘크리트가 마치 서커스 단원들이 재주를 부리는 외줄과도 같이 느껴졌다. 생(生)과 사(死)를 가르는 경계. 그 경계를 걷고 있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걷고 있는 동안만큼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앞으로 나가기만 했으면 좋겠다. 이곳에선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걷다가 힘들면 쉬어가고, 또 걷고 걸을 뿐. 길 위를 걷고 있는 복남은 더 이상 비극 속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연쇄 살인범에게 딸을 잃은 복남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인터넷의 자살 클럽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위한 여행을 준비한다. 한편, 영화감독 지망생인 구열은 옛 여자친구를 대신해 연쇄 살인 사건의 희생자 장례식에 취재를 나갔다가 피해자의 아버지인 복남을 만나게 된다. 복남의 부탁으로 구열은 ‘상처를 치유하는 모임’에서 기획한 다큐멘터리인 줄 알고 여행 과정의 촬영을 맡게 되는데, 이 도보여행에 자살 클럽 회원인 미미와 소진도 동행한다. 저마다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이들은 여행이 시작되면서 소소한 갈등과 마찰을 겪으며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게 된다. 구열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 표현되는 이미지의 실제와 왜곡 속에서 이들의 여행은 점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올해는 두 편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투고 편수가 작품들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투고작이 감소한 탓인지 작품 자체도 예년에 비해 다소 우려할 부분이 많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의 도구이자 본질인 ‘언어’에 대한 자의식과 존중이다. 주인공의 성격이나 환경에 걸맞은 장치로 구어체나 유행어를 사용하는 것은 좋지만, 주제나 작가의식을 담보하는 장치로서 품격이나 일관성을 배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성작가들도 어려워하는 장편소설의 영역에 대학생으로서 도전하고 그 결과로 일정 부분 성취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이라 판단되어 흔쾌히 수상작을 내는 데에 동의했다. 투고작들은 모두 죽음이나 자살, 실업과 젊음의 우울 등 시대적 주제를 형상화하는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소설들이었다. 먼저 「미운 백조 스물셋」은 전형적인 가족 서사에 어우러진 젊은 여성의 자아 찾기를 그린 소설로, 스물세 살 난 전문대 졸업반 여대생의 취업난과 가난한 집안 형편, 아버지의 무능력과 외도, 젊은이의 유흥문화, 원나잇 경험, 쇼핑 중독 등 동시대 문화 아이콘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소설은 몰개성에 빠지고 말았다. 상투적인 에피소드나 인물들의 성격을 중심으로 아마 현대의 여대생들에게 소설을 쓰라고 한다면 이런 유의 소설을 대부분 쓰지 않을까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언니의 갑작스러운 귀국과 상처도 가장 중요한 전환의 계기인데도 설득력 있게 제시되지 못한 점, 필요 이상으로 통속적이고 자극적인 설정을 통해 사건을 묘사한 점 등이 한계로 남았다. 「Andante, 안단테」도 결점은 있다. 비논리적 구성, 인물들의 정형성, 예측 가능한 결말, 인물에 부합되지 않는 대화나 상황 묘사 등은 읽기를 방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연쇄 살인범 유영철 사건을 계기로 쓴 소설답게 아동 살해와 자살 카페라는 매우 사회성 짙은 소재를 죽음이나 용서, 화해와 같은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로 승화시켜 버무리는 능력이 탁월했다. 신인다운 패기로 다루기 힘든 주제를 정면 돌파하는 배짱이 인상 깊었다. 어린 딸을 유괴범에게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절제해서 표현하는 것에는 성공했는데, 그 유괴범을 용서하는 마지막 부분은 윤리적으로는 옳지만 문학적으로도 옳은 일인가는 딜레마로 남는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내년에는 더 많은 투고자들의 다양한 소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화글빛문학상은 이화의 문청들을 위한 진정한 축제이니까. 이화글빛문학상 심사위원 배수아(소설가), 김미현(이화여대 국어국문학전공 교수, 문학평론가)